[책을 읽고] 카를로 로벨리,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1)
"물리학의 임무가 자연이 어떠한지 기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리학은 자연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다룰 뿐이다." (44쪽)
닐스 보어의 말이다.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어느 물리학자의 말도 유명하지만,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이 단 한 사람 있다면, 그건 아마도 닐스 보어일 것이다. 그런 그가 한 이 말은, 겸손함을 넘어 진리를 드러내는 한마디가 아닐까.
뉴턴과 그의 광신자였던 라플라스로 인해, 인류는 우주의 비밀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이 뉴턴이 놓친 지점을 찾아내고, 닐스 보어와 아이들이 물리학을 서로 합쳐지지 않는 두 개의 조각으로 쪼개놓았음에도, 인류는 여전히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고, 다시 말해 물리학이 우주를 증명할 수 없다는 말을 인용하는 이 책은 카를로 로벨리의 책이다. 초끈 이론의 사실상 유일한 경쟁자인 루프양자중력 이론의 선두 주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루프양자중력 이론은 시공간 그 자체를 양자화한다는 점에서 초끈 이론과 다르지만,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통일을 꾀한다는 점에서 초끈 이론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이론을 연구하는 사람이 마치 항복 선언이라도 하는 느낌이다.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는 말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다중 세계 해석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중첩, 그리고 관찰에 의한 중첩 상태의 붕괴는 과연 실제로 어떤 의미인가? 바로 이 문제를 설명하는 시점에서 이 책은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가장 쉬운 해석은 유명한 다세계 해석이다. 이 아이디어(!)를 제안한 에버렛을 과학자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이 생각은 만화 같은 이야기다. 이 아이디어는 존 스칼지의 SF 소설, <노인의 전쟁>에서 워프 항행을 설명하는 데 동원되고 있다. 그만큼 직관적이다.
간단히 말해, 슈레딩거의 고양이를 관찰하는 시점에서, 산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 존재하는 두 개의 우주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제는 식상하다 못해 짜증이 나는, 이른바 <다중 우주> 이야기다.
나는 에버렛의 이 아이디어가 과학적 사고의 기본 중의 기본인 오컴률을 어기기 때문에 거부한다. 실제 우주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래서 이런 책을 쓰고 읽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우주가 에버렛의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낭비가 너무 심하다.
카를로 로벨리 역시 에버렛의 아이디어를 거부한다. 그 이유는 이 아이디어가 너무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주는 비효율적이고 게으를 수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이 가지는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점은
그 자체로는 우리가 실제로 관찰하는 현실의 현상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것이죠. (62쪽)
어쨌든, 다중 세계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 다음으로 유명한 해석이며, 아주 인기 있는 해석이기도 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보다는, 엉성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더 마음에 들기 때문일 것이다.
숨은 변수 해석
양자 중첩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손쉬운 방법은 변수를 추가하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관측할 수 없는 변수로 말이다.
전자의 행동은 변수(파동)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 변수는 우리에게 ‘숨겨져’ 있습니다. 그 변수는 원칙적으로 숨겨져 있고, 결코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해석을 ‘숨은 변수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64쪽)
간단히 말해,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았거나 어쨌든 하나뿐이다. 다만 우리가 관찰하기 전까지는, 어떤 숨은 변수의 <간섭>으로 인해 비확정적인 상태처럼 보일 뿐이다.
어찌 말이 되는 것 같지만, 이 해석 역시 <다중 세계 해석>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관찰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어떤 방식으로도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데,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존재란 무엇인가?
말장난이 아니다. 숨은 변수로 해석하는 방법은 인류가 오랫동안 써먹어 왔던 방식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이라는 존재들이다. 이런 설명을 과학이라 하는 것도 꽤 대담한 주장이다.
물리적 붕괴 (근사치) 해석
다음은 붕괴가 실제로 일어난다고 믿는 방법이다. 게다가 붕괴는 관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영국의 해안선 길이는 무한대라는 말이 있다. 어떤 자를 써서 측정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무한히 작은 길이를 측정할 수 있는 자로 측정하게 되면, 길이는 무한대가 된다. (물론 플랑크 길이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해석은 양자역학이 <근사적 계산>이라는 주장을 편다. 현상은 정확하게 일어난다. 즉 물리적 붕괴가 일어난다. 그러나, 인류 내지 인류의 과학이 가지는 한계로 인하여 우리는 단지 근사적 계산만을 할 수 있다.
오차들은 서로 정정한다. 수많은 오차가 모이면 결국 오차값은 매우 작아진다. 마찬가지로, 거시적 세계에서 양자역학의 근사적 계산은 서로 상쇄된다. 그래서 뉴턴 역학이 성립하는 것이다. 거시적 세계에서 양자 중첩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앞선 두 가지 해석에 비해 훨씬 나은 해석이다. 다만, 이 해석도 우리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이 해석을 더해서 더 분명해지는 부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은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계산 도구 해석
다음으로 저자는 소위 QBism의 해석을 소개한다. 양자 파동함수는 단지 계산 도구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큐비즘의 핵심 발상은, ψ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가지는 ‘정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리학은 세계를 기술하지 않습니다. 물리학은 세계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을 기술합니다. 우리가 세계에 관해서 갖는 정보를 기술하는 것이죠. 정보는 우리가 관찰할 때 증가합니다. 그래서 ψ는 우리가 관찰할 때 변하는데, 이는 외부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 관한 우리의 정보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68쪽)
직관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우리는 2라는 숫자를 늘 사용하지만, 세계에 2라는 숫자에 대응하는 대상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추상화한 개념이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공동 상상>의 일종이다.
숫자가 없었다면 우리가 과학을 만들 수 있었을까?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이 없었다면 내가 이 글을 쓰는 컴퓨터도 만들 수 없었다. 양자역학은 상상력이고, 컴퓨터는 실재한다.
소결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실재(우주)를 우리가 어떻게 인식(관찰)하는가 하는 문제다. 관찰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문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