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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May 30. 2024

충무공 사생팬, 팬픽 읽다

[책을 읽고] 김훈, <칼의 노래>

김훈 작가는 문장이 섬세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인 <칼의 노래>의 첫 문장 역시, <안나 카레니나>나 <광장>의 첫 문장만큼은 아닐지라도, 매우 유명하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9쪽)


책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지인이 <칼의 노래>를 추천해 준 것이 이미 1년도 넘었다. 전자책이 없어 종이책으로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미루어 왔다. 이제라도 읽게 되어 묵은 숙제를 해낸 느낌이다.


작년 가을 쯤, 일본의 유명한 만화에 충무공이 등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히데요시를 주인공으로 하는 그 만화는, 동아시아에 레벤스라움을 만들려는 히데요시를 막아선 "용"으로 충무공을 그리고 있다. 그가 23전 23승, 전승의 명장이라는 사실은 인상적이지만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그 만화에서 더욱 감명 깊었던 것은, 만화가가 소개하는 <난중일기>였다.


어머님 생각에 눈물 흘리는 충무공


멀리 홀로 계신 어머님 생각에 눈물 흘리고, 병사들과 술을 너무 마셔 다음 날 내내 힘들어하는, 인간적인 모습의 충무공을 보고 나는 난중일기(물론 전자책)를 또다시 찾아 읽었다. 이제, 같은 이야기를 김훈의 필체로 다시 읽는다.



유려한 문장들


공의 <난중일기>를 읽다 보면, 가슴이 메이는 순간이 두 번 온다.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아들 면이 죽었을 때다. 공은 이후에도 어머님과 아들을 생각하며 슬퍼하기를 거듭한다.


문장이 섬세하기로 소문난 김훈 작가는 공의 이런 아픔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낡은 소금창고들이 노을에 잠겨 있었다. 나는 소금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 적들은 오지 않았다. (120쪽)


충무공의 주요 전투, 특히 (정유재란이 아닌) 임진왜란 당시 전투는 포구에서 몰이사냥을 한 것이 많다. 이를 작가는 멋지게 표현한다.


포구에서 포구로 이동하며 물가에 눌어붙은 적을 긁어냈다. (227쪽)


그런데 이 "눌어붙은"이라는 표현은 여러 차례 등장인물들의 입에서 나오는 걸 보면, 실제로 군사용어처럼 쓰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독자들에게 신선한 표현이다.


나폴레옹이 여러 차례 다른 말로 표현했듯, 모든 전쟁은 결국 밥 싸움이다. 공의 승리도 결국 준비와 보급에서 시작된 것들이다. 따라서 병졸들에게 밥 먹이는 것은 공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끼니때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189쪽)


정말 멋진 표현이지 않은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충무공은 너무 사색적인 인물이라 조금 거리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런 표현은 사색과 내적 침잠이 아니라면 나오기 어렵다.


이와 더불어, 저녁으로는 된장국과 절인 채소를 먹이고 밤참으로는 말린 생선과 해초를 먹인다는 식으로 전개되는 구체적인 메뉴 이야기도 흥미롭다. 나폴레옹이 벌였다는 저장식품 경진대회에 말린 생선과 해초를 출품했다면 어땠을까.


***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는 법이고, 영웅 서사시에게 이 끝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어렸을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던, 공의 최후는 이 책에서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 북을... 계속... 울려라. 관음포... 멀었느냐? (320쪽)


전투가 한창이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은 이미 했다. 그러나 그것이 공의 마지막 말은 아니다. 김훈 작가가 묘사하는 공의 마지막 한마디는 위 구절이다. 공의 사람됨을 잘 알려주는 절묘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히데요시를 막아서는 "용", 이순신


사람들


이 작품은 2001년에 나왔다. 충무공에 관한 연구는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 이후에도 꾸준히 나왔다. 그 어려운 시기를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에 관한 재조명 역시 꾸준히 이루어졌다.


이순신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 단지 사생팬 차원에서 나만큼 공부한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순신도 사람인데 단점이 없을까, 원균도 사람인데 장점이 없을까, 이 두 가지가 내가 주안점을 두고 파들었던 부분이다.


특히 충무공의 일기를 읽으면서, 어쩌면 한 사람을 이토록 미워할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읽었는데, 어떤 사람을 지상 최대의 악당으로 묘사했다면 그 악당보다는 일기를 쓴 사람을 먼저 주목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사실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공부했다.


결론은 당황스러웠다. 충무공은 단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원균은... 장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선악과 장단의 스펙트럼 어딘가에서 적당히 회색조로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혐오해 마지 않는 선조 조차도,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송 휘종과 마찬가지로 난세가 아닌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그럭저럭 평타 이상을 쳤을 인물이다.


이 책에서 대단히 평면적인 악당으로 그리고 있는 두 인물, 배설과 진린에 대해서는 아쉽다고 말하고 싶다. 이는 아직 연구가 미흡한 2001년의 상황 때문일 수도 있고, 충무공의 고뇌에 초점을 맞춘 결과적 부산물일 수도 있다.


특히, 배설을 나중에라도 꼭 잡아 효수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는 충무공은,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그의 성격과 조금도 맞지 않는다.


나는 배설과 진린, 둘 다 입체적인 인물이고, 악보다는 선 쪽의 인물이라 생각한다. 배설은 충무공의 그 유명한 "열두 척"을 지켜낸 사람이고, 칠천량에서 모두가 죽는 와중에 퇴각하면서 민간인들까지 구원한 인물이다. 어떤 대체역사소설에서 그는 이순신과 함께 조선을 개혁하는 혁명 동지로 그려지고 있는데, 나는 천시가 맞았다면 배설이 그런 일을 했을 인물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진린을 싫어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가 중국인이라는 것이 가장 크다고 본다. 진린의 분명한 단점이라면 뇌물을 많이 챙겼다는 것인데, 이는 진린의 또다른 뚜렷한 단점인 인간관계가 형편 없었다는 것과 관련이 없을 수 없다. 역사의 기록을 진린이 직접 남기지 않았으니, 그에 대해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더 많이 기록된 것은 당연하다. (일기를 씁시다. 충무공처럼.)



소결


역사를 다룬 소설은 흥미롭다. 나는 여러 다양한 버전으로 <삼국지>를 100번은 족히 읽었다. <삼국지>를 100번 이상 읽은 사람은 나 말고도 아주 많다. 이들은 교훈을 얻거나 생각할 거리를 찾아 <삼국지>를 읽지 않았다. 재미있어서 읽은 것이다.


<칼의 노래>는 술술 읽히지 않는다. 문장의 밀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다. 예전에 영화 <사도>가 개봉했을 때, 나는 개봉 당일 관람을 했고 주변에 널리 홍보를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려 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물어 보니 한 사람이 대답했다. 역사로 알려져 있는 이야기는 결말이 뻔한데 그걸 왜 보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삼국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 안다. 관우가 얼마나 허무하게 죽는지, 제갈량의 신통제를 위연이 어떻게 망쳐 놓는지, 웬 뜬금 없는 자가 삼국을 통일하는지 다 알면서도 보고 또 본다.


그렇다고 <삼국지>에 교훈이나 생각할 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살면서 <삼국지>에 나오는 명언을 수십 번 인용했다. 삼국지에서 비롯한 사자성어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삼국지를 읽는 사람들은 재미를 찾아 읽는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팬심만으로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권할 자신은 없다. 아름답고 섬세한 문장도 한두 번이다. 계속되는 질척한 문장에 읽는 내가 힘겨웠던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충무공 사생팬으로 당연히 해야 했던 숙제를 했으니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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