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브뤼노 카반 등, <세상을 바꾼 전쟁의 모든 것 2>
스탈린그라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독일의 패전은 소련과의 섬멸전 결과이며, 그 핵심에 스탈린그라드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미디어는 이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려 한다. 어린 시절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나치 독일에 대한 결정타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 중 어느쪽이 더 중요했냐를 두고 입씨름하는 것은 별 의미도 없고, 해답을 제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훨씬 더 나은 방법이 있는데, 전쟁 당시 미디어가 어떻게 보도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전 세계 사람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중요성을 완벽히 인식하고 진행 상황을 초조하게 주시했다. 영국의 선술집 펍pub에서 사람들은 저녁 뉴스 시간에 라디오를 틀어 놓고 스탈린그라드 소식이 나오기 전에는 라디오를 끄지 않았다. 〈아무도 다른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라고 어느 기자는 지적한다. (중략) 1942년 9월과 10월에 프랑스의 경제학자 샤를 리스트는 자신의 일기에서 새 글을 시작할 때마다 단 하나의 똑같은 문장을 반복한다. 〈스탈린그라드는 여전히 건재하다.〉(중략) 1942년 가을, 소련의 신문들은 스탈린그라드 군인들의 믿을 수 없는 영웅적 태도를 한결같이 찬사하는 이집트부터 캐나다, 인도에 이르는 전 세계의 보도를 인용했다. (324쪽)
비록 소련 내의 상황이기는 해도, 장-자끄 아노 감독의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는 이 현상이 어느 정도 묘사되고 있다.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 <스탈린그라드>라는 이름으로 개봉되었다.) 물론, 이 현상은 1945년 종전과 함께 한 순간에 사라졌다.
점점 반공화되었던 서유럽은 전후 소련을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 쌍둥이로 간주했고, 전쟁에서 소련이 치른 손실을 기념할 마지막 기회조차 사라졌다. 붉은 군대는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기억 대신, 1945년에 베를린에서 자행한 대규모 강간의 기억을 남겼다. 책과 영화에서는 독일 군인들을 더 관대하게 조명했다. (326쪽)
태세전환과 사실 왜곡은 정치꾼들의 기본 스킬이지만, 씁쓸한 뒷맛은 여전하다.
1945년 5월에 프랑스 사람들에게 어느 나라가 독일의 패배에 가장 크게 기여했는지를 물었을 때, 조사 대상의 57퍼센트가 소련이라고 답했고 20퍼센트가 미국이라고 답했다. 2004년에 프랑스에서 비슷한 여론 조사를 진행했을 때는 정확히 반대 결과가 나왔다. (327쪽)
이건 세뇌의 결과일까, 아니면 옛 증오를 새로운 증오로 뒤덮는 어리석음일까?
일부 전문가들은,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를 정복하여 캅카스의 석유 산출 지역들을 차지했다면, 연합군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마 훨씬 더 큰 대가를 치렀어야 할 것으로 본다. 연합군이 유럽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핵폭탄을 사용하고 그에 따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영향을 유럽 대륙이 감당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토의 지도자나 유럽 연합의 대표 및 총리들은 대체 몇 명이나 그 전쟁터를 방문하고, 목숨을 바쳐 그들의 문명을 구해 낸 이들을 위해 화환을 놓았는가? (329쪽)
죽은 자는 어떻게 하나
<일리아스>의 클라이맥스는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이며, 그 종말은 죽은 헥토르를 아킬레우스가 끝없이 모욕하는 장면이다. 그리스인 호메로스가 그리스인 영웅에 대해 왜 이렇게 묘사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이런 행위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제네바 협약 제 4조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교전 당사국들은 부상자와 병자, 사망자의 이름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서로에게 알린다. (……) 교전 당사국들은 사망 확인서를 작성해 서로에게 전달한다. 전쟁터나 사망자의 몸에서 발견된 개인 소지품도 전부 모아 보낸다. 이때 인식표를 반으로 잘라 함께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시체에 매달아 두어야 한다. (48쪽)
죽은 자에 대해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느낌은 인류 공통의 것인가 보다.
그러나 전쟁이란 증오의 극단적인 표현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서는 이 규정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양 진영에서 모두 죽은 자에게 범죄가 자행되었다. 묘소 훼손, 시신 절제, 두개골이나 신체의 다른 부위(코, 귀……) 수집 형태로 이루어졌다. (51쪽)
이 전쟁이 서로를 다른 인종이라 생각하던 국가 사이의 전쟁이라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무려 20세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스페인 내전 중에 베르나고스는 이렇게 예고했다. 〈진정한 평화 회복은 언제나 묘지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묘지부터 평화롭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57쪽)
그래서일까. 지금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대형 군인 묘지는 미국-멕시코 전쟁 전사자를 위해 1847년 켄터키주에 처음 만들어졌다.
생각거리들
- 군인의 신체는 전쟁을 위한 부분과 행진을 위한 부분, 두 개로 되어 있다. 이걸 이해하면 여러 가지 모순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제1차 세계대전은 어중간하게 끝난 결과, 2차 대전 직전까지 기나긴 전쟁 준비 단계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은 철저한 파괴와 항복으로 끝난 나머지, 기나긴 평화가 찾아왔다.
-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민족주의를 억제하기보다는 부추길 위험이 더 컸다. (282쪽)
- 재향 군인이 항상 명확히 정의된 사회적 범주를 이룬 것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체가 생기고, 그들에게 특수한 권리가 인정되고, 또 그들이 공동의 이념을 중심으로 결집해야 했다. (291쪽)
- 남북 전쟁 이후 화해 무드는 패자인 남군을 동정하고 승자인 북군을 혐오하는 정서로 표출되었다.
-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사칭하는) 사기 행각은 1970년대부터 우리 사회에서 나치 수용소 생존자 증인이 차지한 위치를 가늠하게 해준다. (3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