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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an 06. 2025

자아란 무엇인가

[책을 읽고] 그레고리 번스, <나라는 착각>

죽음이 두려운 것은 자아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아라는 것이 한갓 환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2500년 전 싯다르타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주장해온 이야기다. 이 서사가 더욱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은, 현대 뇌과학이 발견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실들 때문이다. 이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자아라는 어떤 중심은 없다. 당신은 경험하는 주체나 인식하는 주체가 아니다.

2. 시간이라는 흐름은 없다. 자아라는 것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지속한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줄리안 바버나 카를로 로벨리로 대표되는, 시간이 환상이라는 두 번째 주장도 흥미롭지만,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서사의 대부분은 첫 번째 입장, 즉 우리의 존재가 인식의 주체와 같지 않다는 주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시간에 관한 서사가 물리학(때로는 철학)을 중심으로 전개되듯, 인식과 경험에 관한 서사는 대개 뇌과학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책도 다르지 않다. 저자는 신경외과 의사다.



자아라는 착각


인간의 뇌가 예측이라는 기능을 중심으로 디자인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제 꽤 폭넓게 수용되고 있는 사실이다. (로이 바우마이스터 등 저명한 4명의 저자가 공동으로 집필한 <호모 프로스펙투스>를 비롯하여 여러 책이 나와 있다.) 외부 데이터를 시시각각 받아들여 외부 세계를 구성하는 것보다, 조금 전 세계의 모습을 기본으로 하고, 새로운 데이터를 반영하여 조금씩 수정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동영상 압축 기술을 생각해보자.)


기존의 장면, 그리고 다음 장면을 이어주는 과정에서 결국 시간이라는 요소가 개입되는데, 이 지점에서 서사, 즉 이야기라는 요소가 개입한다. 이야기라는 접착제가 없다면, 시간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 이야기라는 것은 결국 외부 데이터를 인식하고, 조금 전의 장면을 기반으로 다음 장면을 예측하는 주체를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 주체가 (우리가 인식하는) 자아다.


이 과정에서, 뇌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 기억은 크게 축약된다. 이렇게 막대한 비율로 압축된 기억에는 당연히 빈 공간이 존재하고, 이런 빈 공간을 채워넣어야 하는 상황에서 (예컨대 증언을 해야 한다든가 할 때) 거짓기억이라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자아 정체성의 구성이 우리 머릿속에 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저해상도 표현과 다를 게 없다고 믿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과학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3장, '뇌는 불완전한 편집자' 중에서)


뇌라는 컴퓨터가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기록하려면, 적어도 자기 자신과 같은 용량의 컴퓨터가 필요하다. 그러나 외부 입력도 처리해야 하는 뇌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뇌는 '자아'라는 것을 저해상도로 압축해서 기록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학생들에게 (GoPro와 같은) 액션캠을 착용하고 캠퍼스를 돌아다니게 한 뒤 그들의 기억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 학생들은 앉아 있을 때나 이동할 때의 기억을 5배나 많이 저장했고, 그 사이의 기억은 드문드문했다. 더 중요한 사실(변화)을 중심으로 기억을 압축하는 것이 뇌의 방식이다.



베이즈 뇌 (Bayesian Brain)


이야기의 중심 뼈대를 이루는 장면들을 학자들은 스키마(schema)라고 부른다. 결국 뇌는 스키마를 토대로, 새로운 입력에 의해 고쳐야 할 부분을 업데이트하는 방식으로 기억을 저장한다. 이는 마치 베이즈 확률 업데이트와 비슷하다.


현재의 자아는 단지 1~2초 동안만 존재하지만, 그 순간적인 존재조차도 머릿속에 압축된 스키마와 분리할 수 없다. 현재의 자아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준비를 하기 위해 과거의 지식을 사용하여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해석한다. 따라서 사전 믿음과 경험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4장, '감각도 경험에 의지한다' 중에서)


이것은 자아, 즉 내감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과정에서 (촉각을 중심으로 하는) 감각에 의해 나의 내부와 외부가 구별되고, 이 과정에서 내부라고 파악된 것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감정과 나를 동일시하지 않는 경우, 감정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조언이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예를 들면 I am angry라고 말하는 대신 I feel angry라고 말하면 분노 감정이 누그러진다는 것이다.


유명한 실험인 고무손 현상(고무손을 간지럽히는데 실제 손이 간지럽다고 느끼는 현상)이나, 자동차 운전을 할 때 자동차 전체의 공간감을 마치 내 몸처럼 느끼는 현상(내게는 절대 일어난 적이 없다)은, 자아의 경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다.


자아가 이렇게 구성된 허구라는 생각은 천재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이미 18세기에 제안한 바 있다. 현대 철학자들 중에서는 중앙화된 자아를 주장하는 대니얼 데닛과 분산화된 자아를 주장하는 폴 리코르가 대표적이다. 고무손 현상이나 자동차의 사례에서 보이는 자아의 확장 현상을 감안하면, 중앙화된 자아보다는 분산화된 자아가 더 그럴싸한 설명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아라는 경계를 구성하고 그 중심으로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하는 기능은,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는 유명한 네트워크에 의해 유지된다.


또, 베이즈


사회라는 맥락


타인의 사고를 유추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인간만이 갖고 있다. 이 능력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연구자들은 이를 정신 이론(Theory of Mind)이라고 부르는데 간단히 ToM이라고도 쓴다. ToM은 협력을 가능케하는 강력한 진화적 적응이다. (9장, '진화는 개인주의를 싫어한다' 중에서)


간단히 말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물들도록 진화했다. 이는 무리 동물로서의 이점을 극대화하려는 단순한 전략의 결과다. ToM은 뇌의 예측 기능의 한 버전이다. 다만, 나의 미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예측한다는 점이 다르다. (ToM을 대니얼 데닛은 민간심리학이라 부르고, A. J. Ayer는 유아론을 반박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ToM은 더 넓게 뻗어나간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예측하기를 넘어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생각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끝없이 뻗어나갈 수 있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이 수많은 정보를 저장하기 위해 압축할 수밖에 없다.


이어, 저자는 다중인격자의 뇌, 살인자의 뇌, 정신질환에 걸린 뇌, 그리고 (종교와 같은) 강렬한 믿음을 가진 뇌를 논하면서 자아가 분열될 수도 있고 변형될 수도 있음을 논증한다.



자아를 바꾸는 방법


이렇듯 자아가 망상이라면, 자아를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책의 3부는 자아를 바꾸는 방법에 관한 것인데, 실망스럽게도 자기계발서 같은 내용이다. 원하는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면서 작은 행동을 바꾸어 나가라는 것이다. 책 제목과 저자 소개만 보고, 뇌과학 입장에서 서술한 <상처받지 않는 영혼>을 기대한 나를 실망시키는 내용이었다.


저자는 독서가 뇌의 서사 궤적을 바꾸는 데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쓰레기를 읽으면 쓰레기가 된다는 말을 하면서 특히 음모론을 피하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선택의 상황에서 후회 최소화 전략을 사용해 보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뭔가를 하고 후회하는 편이 뭔가를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는, 이미 잘 알려진 지혜도 되돌아 보라고 말한다.


책 제목은 '나라는 착각'이지만, 자아가 환상이라는 내용이 아니었다. 자아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바꿀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얘기는 이미 차고 넘친다. 그걸 굳이 뇌과학까지 들먹이면서 다시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흥미로운 뇌과학 실험들을 접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맺음말이 너무 멋있다. 인용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이 책을 쓰기 시작한 사람과 맺음말을 쓰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여러 명의 저자가 쓴 것인가? 여기까지 읽었다면 답은 ‘그렇다’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연히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고, 약간의 주름과 백발을 빼고는 똑같아 보인다. 이 책이 서점에 나올 때쯤, 저자는 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공항에서 저자와 닮은 사람을 만난다면, 그는 이 책을 설명하는 데에 힘들어 할 수 있다. 결국 그에게는 과거의 일이고, 그는 아마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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