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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n 23. 2018

타블로이드지 대신 위인전

[책을 읽고]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유명인사, 소위 셀러브러티에 관한 뉴스는 왜 존재할까? 알랭 드 보통은 <뉴스의 시대>에서,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비극보다 영국 왕실에 태어나는 신생아 뉴스가 훨씬 더 잘 팔린다는 사실을 제보한다. 상품이 시장에 나오려면 수요와 공급이 있어야 한다. 일단, 수요 측면을 보자. 우리는 왜 셀럽 뉴스에 귀를 기울일까?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명성을 얻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미 명성을 얻은 자들의 뉴스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데 명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별난 것도 아니다.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의 핵심에는 감동적이면서도 단순한 열망이 있다. 바로 제대로 대접받고 싶다는 바람이다. (제5장 중에서)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건 무얼 뜻할까? 사실, 그건 단지 친절함을 향한 갈망에 불과하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의 도시를 지배하는 규범은 무관심이다. 명성이라는 말이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면, 그 반댓말로 치욕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명성에 이끌리지 않는 사람도 치욕으로부터는 달아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명성을 이미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마음 속에 파문을 불러 일으킨다. 돌이 던져지는 것이다.

동년배나 같은 성별인 사람이 유력자들과 어울려 다니고 수백만 명의 관심을 끌면서 사업체를 사고파는 기사를 읽고 나서 이를 관대하게 받아들이고 잔잔한 기쁨을 느낄 사람은 심각하게 상상력이 빈곤한 이들뿐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제5장 중에서)

그래서 명성은 또한 험담과 폭력을 가져 온다. 엘튼 존을 조롱한 <가디언>지는 그가 기사를 유머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에 대해 유감이라고 논평했다. 잔인한 댓글에 상처받는 연예인들의 기사는 새롭지도 않다.

결국 인간은 무관심도 지나친 관심도 견디지 못한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서로에 대해 '품격있는 관심'을 가지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 이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고 결론 내린다. 그런데 이것이 결론이라 말할 수 있는 건가? 인간이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라니.

다음은 공급 측면을 살펴본다. <뉴스의 시대>는 기본적으로 공급자의 입장에서 뉴스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정치 뉴스는 어때야 하고, 경제 뉴스는 어때야 한다는 제언을 쏟아낸다. 저자는 심지어 셀럽 뉴스에까지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는 대담함을 선보인다. 그냥 느낀 점 나열식 수필이 아니라는 점은 환영하지만, 과연 현실성 있는 대안일지 궁금해진다.

언론이 좀 더 친절하다면, 타인이 거둔 승리를 그저 신비롭고도 당연한 사실로 묘사하기보다는, 그들이 승리하기 위해 어떤 걸 쏟아부었는지 정확히 분석하는 데 막대한 힘을 들일 것이다. 언론은 성공담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실제로 모방할 수 있는 사례연구로서 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제5장 중에서)

셀럽 뉴스가 위인전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말 그런 역할이 가능할지 잠깐 생각해보자.

저자에 따르면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찬미라는 행위가 거리낌 없었다고 한다. 스포츠 선수나 극작가, 심지어 정치인에 대한 찬미가 축제와 문학작품, 그리고 지금까지 전해지는 조각상의 형태로 벌어졌다. 이에 대해 저자는, 사람들이 다른 이를 찬미하는 원동력이 자기계발에 대한 의지였다고 주장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했다면, 현대의 우리도 못 할 건 없다.

문제는 정보의 양에 있다. 고대 아테네인들이 찬미하고 본받으려 했던 이들은 하나의 고대 도시에 살던 인구에 국한되어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대상 집단의 크기는 70억이다. 고대 아테네 올림픽 단거리 챔피언은 기껏해야 몇만 명 중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었겠지만, 우사인 볼트는 70억 중에 가장 빠른 사람이다. 중세에는 도시별로 배우와 가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몇몇 배우와 가수가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해 버린다.


대구육상선수권 당시 우사인 볼트



반에서 1등을 하겠다는 결심과 전국 1등을 노리는 결심이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을까? 우사인 볼트처럼 빨리 달리겠다는 욕망을 가질 만한 사람이 전 세계에 얼마나 있을까? 일론 머스크처럼 되겠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구나 그런 야망은 대개 실패의 쓴맛으로 귀결된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셀럽 뉴스가 존재하는 이유는 팔리기 때문이다. 시장에 수요가 있으니 공급자가 생기는 것이다. 영국 신문 시장의 패권자는 정통지 <타임즈(The Times)>가 아니고 타블로이드지 <더 선(The Sun)>이다.

아쉽게도,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저 어이없는 주장을 반복한다. 셀럽 뉴스는 우리가 본받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왜 뉴스가 그런 일까지 떠맡아야 하는지, 정말 묻고 싶어진다. 하지만 다행히도, 알랭 드 보통이 정말로 주장하려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우리는 무선 신호를 끊고 읽을거리도 손에 쥐지 않은 채 멀리 기차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다. 객실은 거의 텅 비어 있고 탁 트인 경치가 펼쳐 있으며 들리는 거라곤 기차 바퀴가 철컹컬컹 리듬감 있게 연속적으로 철로를 지나는 소리뿐이다. (제8장 중에서)

그렇다. 내 어떤 친구는 예전에 컴퓨터와 인터넷은 물론 책까지도 내려 놓고 일주일 동안 섬에서 지낸 적이 있다. 별난 녀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결단과 용기를 나는 부러워했다. 모든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닫고 지내는 시간. 내면의 탐색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그런 시간은 우리를 좀 더 본질적인 무엇과 가까이하게 한다.



그런데 기차 여행이라. 거의 언제나 꽉 차 있고, 오 분도 안 되는 간격으로 각종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며, 모니터에서는 광고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KTX 일반실이 내 현실에 존재하는 기차다. 탁 트인 경치보다는 터널과 터널이 계속 이어지는 그런 철도를 기차는 달린다. 게다가 목적지는 거의 언제나 서울이다.

한가한 시간에 인적 없는 곳을 향해 달릴 수 있는, 알랭 드 보통이라는 한량이 부러운 이유다. 그런 자유가 있다 보면, 유명인 뉴스가 위인전 역할을 해야 한다는 별난 생각도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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