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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n 16. 2018

금융은 결국 '시스템'의 문제다

[서평] 정대영의 <관점을 세우는 화폐금융론>

경제학은 '케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의 학문이다. 즉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는 가정 하에, 변수를 하나씩 분리해서 생각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그런데 하나의 변수가 다른 변수들과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대단히 독특한 예외에 해당한다.

경기가 나빠지고, 정부가 통화 확장을 시도하려고 할 때마다 '유동성 함정'이라는 말을 듣는다. 케인스가 처음 소개한 이 개념은, 시중에 돈이 풀림에도 이자율이 내려가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경제학의 기본인 수요-공급의 법칙이 맞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이상한 상황인가? 사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된다. 경제 주체는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실직한 사람에게 얼마간의 생활비를 긴급 지원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이 그 돈을 펑펑 쓸 수 있겠나? 실직한 마당에 그는 더 절박한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그에게 간 돈은 돌지 못하고 그의 주머니에 갇히게 된다. 이것이 유동성 함정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공정하게 하겠습니다. 나무 타기로 승부를 내죠."



다른 조건을 무시하고 변수 하나에 집중하는 것은 연구에 있어 좋은 출발점이지만, 그걸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같은 사람이라도, 경기가 좋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의 투자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존의 경제학이나 재무학은 대체로 이런 변수를 무시한다. 대공황 당시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기 위해 사람들이 장사진을 친 것을 목격하고도, 위기 시에 사람들이 평상시와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 가정한다.

극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가정해 보자. 다른 변수가 모두 그대로일 것이라 생각한다면, 사람들을 제치고 빨리 뛰어나가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다른 변수들이 그대로가 아니다. 모두 그렇게 행동하려고 하면 결국 아무도 나가지 못하고 불 속에 갇히게 되고 만다.


나만 일어서면 물론 더 잘 보일 거다. 그런데 정말 나만 일어설까?


"개별 시장참여자도 시스템 전체 리스크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각 금융기관들은 현대의 위험관리 기법을 사용하여 각자 낮은 변동성과 잘 분산된 자산구조를 가질 수 있다. 개별 금융기관의 입장에서 보면 위험관리를 잘한 것이지만 금융시스템 전체로 볼 때는 각 금융기관들의 자산구조가 비슷해 분산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305쪽)


그렇다면 게임 이론이 최선인가? 불행하게도 게임 이론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가위바위보를 앞두고 상대가 뭘 낼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전략이 무한 루프에 빠진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  <관점을 세우는 화폐금융론> 표지 ⓒ 창비


<관점을 세우는 화폐금융론>의 저자 정대영은 에필로그에서 행동경제학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현명한 금융 생활을 당부하고 있지만, 행동 경제학이든 게임 이론이든 시스템 자체가 가지는 위험에 대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상대방도 나와 같이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도입부에서 금융의 기원에 대해서 말한다. 금융은 결국 융통의 문제다. 내게 필요한 것이 없을 때, 융통하는 방법은 약탈 아니면 자선이다. 결국 금융은 약탈 또는 자선에서 기원했을 것이며, 아마도 양쪽의 영향이 반반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 저자는 생각하는 모양이다.

"고리대금업과 같은 약탈적 금융을 줄이는 현실적인 방법은 금융이 약탈과 자선의 중간에 있다는 사실을 잘 활용하는 것일지 모른다. 다양한 금융기관이 서로 경쟁하고 잘 작동하여 금융이 자선의 역할은 못하더라도 약탈과 자선의 중간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약탈적 금융을 줄이는 방안 중의 하나일 것이다." (31쪽)


갑질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고리대금업 역시 인간의 본성이다.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 상황을 십분 활용하는 것뿐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상황이 미래에 역전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흡혈박쥐가 굶주리는 동료에게 먹이를 나눠주는 이유는, 자신이 미래에 그런 상황에 빠질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인간이 박쥐보다도 미래에 대한 생각이 없을까?


박쥐도 알고 보면 귀요미 ^^


순진한 생각일지 몰라도, 시스템이 잘 정비되면 집단에 속한 개인의 약탈적 행위가 제어될 수 있을 것이다. 협동과 배신의 게임에서는 '받은 대로 돌려주기(tit for tat)' 전략이 최적 전략이다. 이 전략의 문제점은 최초 선택 시점에 상대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스템이 이 부분을 보완해 준다면 어떨까? 

'받은 대로 돌려주기' 전략의 최초 선택은 우선 주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배신자인지 아닌지를 미리 알려줄 수 있다면 어떨까? 전략의 단 한 가지 맹점이 커버되는 것은 물론, 참여자 전체가 배신행위를 훨씬 더 꺼리게 될 것이다. 원래의 게임에서 배신자는 모든 참여자를 한 번은 뒤통수칠 수 있지만, 정보가 주어지는 게임이라면 배신자는 단 1회의 배신으로 게임에서 패배에 이르게 된다.

시스템을 만드는 문제는 결국 구성원 간 합의의 문제로 귀결된다. 문제는 합의라고 해서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두 명이 똑같이 15억 원으로 부동산을 구입했다고 하자. 한 명은 그간 집값이 많이 올랐고 앞으로도 계속 오를 것 같은 곳에 아파트 한 채를 사서 1가구 1주택자가 되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집값이 안 오르지만 세가 잘 나가는 지역에 3억 원짜리 아파트 다섯 채를 사서 한 채는 자신이 살고 나머지 네 채는 세를 놓아 임대료 수입을 올린다. 누가 더 투기 성향이 강할까?" (125쪽)


사람들은 대개 두 번째 사람을 투기꾼이라고 손가락질한다. 실상은 물론 다르다. 첫 번째 사람은 몰빵을 하는 도박사고, 두 번째 사람은 분산투자를 하는 '현명한' 투자자다. 이런 상황에서 1가구 1주택자는 보호하고, 집 다섯 채를 소유한 사람은 징벌하려는 제도가 만들어진다면, 그 시스템은 적어도 경제학적으로 안정을 지향하는 시스템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강남에 집 한 채를 소유하려 할 테고, 강남 부동산의 몰락은 한국 경제를 뿌리째 흔들 테니 말이다.

다주택자는 보통 이런 이미지다 (c) 연합뉴스


한국은행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저자는 제도의 중요성을 책 곳곳에서 강조한다. 예를 들면 콜시장은 단기 유동성 위험 해소 기능을 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속적인 자금조달'에 사용된다. 계속해서 만기연장이 가능한 사실상 장기 채권이다. 

반면, 2000년대 중반까지 잘 작동하던 CD 시장은 정부의 불필요한 규제로 망가졌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CP(회사채) 시장이 위축되고 ABCP(자산담보 회사채) 시장이 활성화된 것은, 금융위기에 의한 은행들의 학습효과에 의한 결과지만, 정부가 손 놓고 있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좋은 시스템이란 무엇일까? 하버마스의 말대로, 억압 없는 자유로운 토론이 진리에 다다르는 길 아닐까? 여러 차례 실험에서 증명되었듯이, 똑똑한 소수보다 평범한 다수가 더 올바른 결정을 내린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숙제는 억압 없는 토론의 장을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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