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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n 08. 2018

뉴스에 별걸 다 바란다

[단상] <뉴스의 시대>를 읽다가

우리가 애초에 동일시할 수 있는 행위와 태도로 접하지 않는 이상, 다시 말해 끔찍한 사건 속에서 모든 인류의 일상적인 순간들과 구체적인 삶들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 사건에 대해 제대로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다.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중에서)


흥미로운 지적이다. 우리가 콩고의 비극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건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의 일이라도, 그것이 우리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공감했을 것이다. 외국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 교민이 휘말리지는 않았나 뉴스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침 출근길에 눈인사라도 나누던 아이가 해외 여행 중에 아이티 지진에 휘말렸다고 생각해 보자. 더 이상 그 뉴스는 그냥 머나먼 이국땅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하지만 정말, 알랭 드 보통의 말대로 뉴스가 "투르크메니스탄의 직장생활이나 알제리 사람들의 주말 일상"을 다뤄야 할까? 내 생각에는, 이미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그 일을 하고 있다. '아랍의 봄' 당시 모르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일 수 있게 한 힘이 무엇인가? 심정적 거리는 바로 그런 이야기와 소통 속에서 좁혀진다. 뉴스라는 거대 담론이 할 일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저자의 말대로, 화가나 작가와는 달리 언론매체는 수십, 수백만의 관심을 끌어야 전기세라도 낼 수 있다. 언론매체에 그런 역할까지 바라는 건 사치 아닐까. 폭설이 내렸다면, 정부가 치워주길 바라기 전에 우리집 앞이라도 우선 치우기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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