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얼빈>을 보고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영상미
대사와 연기 빼고 거의 흠 잡을 데 없는 영화다.
특히 영상미가 정말 뛰어나다.
어떤 장면이라도 그냥 스틸샷을 잡으면 화보다.
가장 아쉬운 점은,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고 "까레아 우라"를 외치는 장면에서 끝났다면 역대 최고의 엔딩 중 하나가 되었을 텐데, 아깝다.
물론 이 시점에서 영화를 끝내면 김상현(조우진) 캐릭터가 죽어 버리니 어쩔 수 없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렇게 끝냈다면, <내일의 기억>이나 <한공주>에 꿀리지 않는 엄청난 엔딩이었을 것 같다.
여러 가지로 비교될 수밖에 없는 <밀정>과 비교하자면, 거의 모든 면에서 더 나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밀정> 역시 김지운 감독의 장기인 영상미가 발산하는 영화지만,
<하얼빈>이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든다.
밀정이 갈색 톤이라면, 하얼빈은 회색 톤이다.
대사와 연기 빼고 완벽하다
대사와 연기가 아쉬운데 어떻게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자네는 말야, 다 좋은데 음정과 박자가 안 맞아.")
이 영화를 한번 보시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출연 분량이 매우 적은) 정우성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배우의 대사 연기가 아쉬웠고,
주요 배우들은 대사가 없는 연기조차 아쉬웠다.
특히 조우진조차 이 판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반면, 대사가 없는 장면에서는 모든 배우가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낸다.
릴리 프랭키조차 중후함을 발산하니, 말 다했다.
현빈, 이동욱, 정우성이야 얼굴 천재들이니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조우진, 박정민, 유재명이 콧수염 달고 어두운 방안에서 담배 피우는 게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다.
주구장창 나오는 콧수염 사내들의 집단 토론 장면도 멋지지만,
이 영화에는 정말 스틸컷으로 영원히 박제하고 싶은 장면이 넘쳐 난다.
특히, 이토 저격 장면을 공중에서 내려다 보는 각도로 찍은 것이 매우 좋았는데,
아무리 뒤져도 그 장면을 찾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
사운드 트랙도 훌륭한데,
특히 이토 저격 장면을 빌드업하는 부분은 마치
<관상>의 수양대군 등장 장면을 연상시킨다.
역사 공부는 기대하지 말자
당연한 얘기지만, 이건 영화다.
안중근 평전을 읽었음에도, 생소한 장면이 계속 등장해 의아했다.
안중근이 생포한 일본 군인을 놓아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영화 같은 전투 에피소드가 아니다.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할 당시, 우덕순과 함께 부사수였던 유동하가 생략된 것도 아쉽다.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을 알지 못해 잠시 당황하는 장면 역시 기대했으나,
멋짐을 백배 뽑아내기 위한 연출에 어울리지 않으니 당연히 나오지 않았다.
김상현을 고문하기 위해,
일제가 독일 제국보다 10년이나 앞서 독가스(+방독면)를 개발한 것도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이 어이없는 장면조차 연출이 장난 아니라는 것이다.)
시작 장면을 보면서, 영화가 어디까지 진행할지 궁금했는데
거사 몇 일 전이라는 자막이 나오는 걸 보면서
재판 과정은 나오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안중근의 인간적 위대함은 그의 재판 과정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것이라서,
나는 영화가 저격 이후에 어느 정도 비중을 두리라 예상했다.
최재형을 등장시킨 것은 매우 훌륭한 결정이다.
실제 역사에서 최재형보다 독립 운동에 기여한 인물은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최재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아마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살다가 소련 땅에서 죽었기 때문인 것 같다.
가상 인물이 다수 등장하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바람에
최재형조차 가상 인물이라는 인식이 생길까 좀 두렵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