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론이라는 무례한 공격

[책을 읽고] 리처드 도킨스, <확장된 표현형> (2) - 유전적 결정론

by 히말

결정론자로 유명한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과학적' 결정론자로 제일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라플라스다.

(아르키메데스도 후보일 수 있지만, 고대를 살았던 그의 발언에 대해서는 보충 자료가 부족하므로 패스한다.)


Domenico-Fetti_Archimedes_1620.jpg 물론, (시대가 시대인 만큼) 라플라스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


카오스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아직도 라플라스 식의 과학적 결정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모든 변수와 그들이 관여하는 방정식을 안다면, 결정론이라는 것이 과연 성립할 수 있을까?

그런 결정론을 결정적으로 방어하는 단 하나의 강력한 이론이 있는데, 양자역학이다.

(양자물리학이란 용어가 더 옳은 표현이지만, 어감이 좋아 나는 양자역학이라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적 시각에서 결정론이라는 것이 성립한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굴드 등 일부 진화과학자들이 도킨스를 유전적 결정론자라고 말하는 것은,

무식한 발언을 넘어, 무례한 발언이다.


굴드는, 도킨스란 사람이 과학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어떤 주장을 지지한다고 매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굴드의 저 무식하고 무례한 주장을 도킨스가 굳이 반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도킨스는 이 책의 거의 절반을 할애해 그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유전적 결정론에 관한 도킨스의 설명은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진화적응은 개체(유기체) 단위가 아니라 유전자 단위에서 설명해야 더 쉽게 설명된다.

2. 그러나 이것은 유전자들의 게임만으로 진화적응을 설명하려는 결정론이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자.



유전자 결정론 대 유전자 선택론


‘감수분열 부등meiotic drive’은 정육면체의 두 번째 면인 이기적 유전자 관점으로는 명확히 설명되지만, 우리 마음이 첫 번째 면인 이기적 유기체 관점에 확고히 고정되어 있다면 전혀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다. (1장 중에서)


제2장의 제목은 "유전적 결정론과 유전자 선택론"이다.

책을 읽지도 않고 그를 유전적 결정론자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에 대응하여, 도킨스는 "유전자 선택론"이라는 표현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런 표현만으로 설득하기에,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무식하고 용감하다.


도킨스는 제2장에서, "결정론"이라는 단어와 "유전적"이라는 단어에 대해 마치 언어철학자처럼 논증한다.

그러나, 지적 유희 차원에서 흥미로운 이런 논증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여기까지 글을 쓰다가, 나중에 이어 쓰려고 생각하며 일단 글을 닫았다.


그런데, 능동적 듣기의 달인인 내 친구와 이야기하던 중에, 나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유전자 결정론이란, 유전자가 결정하는 부분을 다른 요인이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글에서 인용한 스티븐 굴드의 표현을 다시 인용하면, 이렇다.


“우리가 누구인지 이미 프로그램되어 있다면 그런 형질들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기껏해야 해당 형질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뿐이지 의지나 교육, 문화를 이용해서 바꿀 수는 없다.” (2장 중에서)


반면, 유전자 선택론이란 무엇이 무엇을 결정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관점 자체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진화적응이 일어나는 선택 단위가 유전자란 이야기다.

내가 친구와 대화 중에 떠올린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그 진화적응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라는 질문에 "유전자"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와 다른 대답으로는 "개체(유기체)"나 "집단(종)" 같은 것들이 그동안 제기되어 왔다.


9788932908885.jpg 그건 내 전문이지만, 도킨스도 제법인데?


무례한 바보들에게 웃으며 반박하는 법


<이기적 유전자>에서 도킨스가 제안한 이론은, 개체가 아니라 유전자, 즉

운반자가 아니라 복제자가 진화적응의 주체라는 이야기였다.

그걸 결정론으로 왜곡하는 것은 무식한 행위 내지 무례한 행위다.


개체 선택이냐 집단 선택이냐가 주된 논쟁거리였던 진화과학의 무대가 발칵 뒤집혔다.

침입자와 싸우며 목숨을 버리는 병정개미를 생각해 보자.

개체 선택 차원에서 생각하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집단 선택,

즉 집단 내지 종의 번영을 위해 한 몸 내버리는 숭고한 희생 정신으로 진화적응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는 유전자 선택으로 훨씬 더 쉽게 설명된다.

병정개미들이 자기 목숨 지키며 싸움을 피하다가는 집단 전체가 전멸할 수 있다.

이는 집단의 소멸과 동시에 해당 유전자 풀의 절멸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치 썩어가는 발을 잘라 목숨을 보존하려는 당뇨병 환자처럼,

개미군집은 병정개미들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적응 가설에서 단일 유전자 방식을 사용할 때는 다수 유전자 모형의 반대로서 단일 유전자 모형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통상은 비非유전자 모형, 예를 들어 ‘종이 얻는 이익’ 모형의 반대로서 유전자 모형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2장 중에서)


zJmq7DW33MiQw2FaMwpc4R-650-80.jpg Image credit: David Nash/University of Copenhagen


여왕은 군림하는가, 아니면 조종당하는가


집단 선택과 유전자 선택의 차이는 서로 75%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개미를 포함하는) 벌목의 일꾼 개체(일벌, 일개미)에게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여왕개미의 입장에서 보면, 수컷 개체나 암컷 개체는 자신과 유전자를 50% 공유하는 점에서 동등하다.

따라서 여왕개미는 아들, 딸 가릴 이유가 없다.


반면, 일개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과 유전자를 50% 공유하는 수컷에 비해

자신과 75%를 공유하는 암컷이 많은 편이 훨씬 좋다.


"여왕"개미라는 표현 때문에 여왕 개체는 마치 절대군주처럼 느껴지지만,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면 여왕 개체는 해당 군집의 대리모 내지 번식기계에 불과할 수도 있다.

실제로 페로몬을 통해 여왕 개체와 일꾼 개체는 군집의 암수 비율에 영향을 미치려는 게임을 벌인다.


관찰 결과, 벌목 군집의 암수 비율은 3:1이다.

일꾼 개체에게 유리한 비율이다.


사실 군집의 주인은 일꾼 개체들이고,

여왕은 그저 번식 기계일 뿐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려는 요점이다. 즉, 명시적이든 아니든 간에 유전자를 들여오지 않고는 혈연 선택이나 다른 어떤 형태의 다윈 선택도 말할 수 없다. (2장 중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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