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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생각 도구

[책을 읽고] 대니얼 데닛, <직관펌프> (1)

by 히말

일본 작가가 쓸 것 같은 <아이디어 도구>식의 제목을 달고 있지만, 아니다.

대니얼 데닛이라는 철학자의 생각 도구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와 철학 논쟁을 하고 싶을 때 도움이 되는 그런 종류의 생각 도구라는 걸 명심하자.


직관펌프는 수 세기 동안 철학을 지배한 힘이다. 이솝 우화의 철학자 버전이라고나 할까. (머리말 중)


제목, 아니 작명에 오해 소지가 있다.

대니얼 데닛이 사용하는 '제대로 된' 직관펌프는 대개 숙고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정교한 사고 실험을 동반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직관이 아니다.


물론, 직관펌프는 잘못된 것도 있다.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을 이끄는 것들인데, 데닛은 이런 것들을 '붐받이'라 부른다.


각설하고, 나는 대니얼 데닛을 믿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모든 문장을 줄 치듯 읽어야 하니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다.

배운 걸 정리하려니 또 막막해서 외면하고 싶었고, 그래서 지금에야 정리를 하게 되었다.


자, 용기를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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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관펌프를 탄생케 한 무뢰한, 존 설


대니얼 데닛은 직관펌프라는 말을 만들어낸 계기가 존 설의 중국어 방 논증을 비판하면서였다고 한다. 존 설이란 사람의 중국어 방 '논증'은 사실 논증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무식한 주장인데, 내 생각에 중국어 방 논증을 가장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으로 논박하는 것은, 이 책에 나오는 번개 이야기다.


https://blog.naver.com/junatul/222310676020?trackingCode=blog_bloghome_searchlist


번개 현상을 옛 사람들은 신의 분노로 여겼다. 어떻게든 설명을 하지 않으면 더 무서웠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과학자들은 결국 번개의 정체를 밝혀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아직도 번개라는 현상에는 전기 작용 이외의 어떤 무엇이 존재한다면서, 그것은 신의 분노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그저 웃을 것이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셈인데, 대개 설명이 더 필요한 그 무엇은 과학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것들, 대개 신, 영혼, 본질 따위의 것들이다.


내게 중국어 방 '논증'은 이와 같다. 짜장면 같이 생겼고, 먹어보면 짜장면 맛이 나는 어떤 물건이 있는데 그것이 짜장면이 아닐 수도 있다, 라는 것이 존 설의 중국어 방 이야기다. 존 설과 같은 부류는 그 짜장면 같이 느껴지는 물건에 부족한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다. 다만 말을 하지 못할 뿐이다. 말을 하면 비웃음을 살 테니까 말이다.


존 설이 보기에, 그 물건에 부족한 것은 짜장면의 '영혼'이다. ('본질'이라 말해도 좋겠지만, 난 존 설 같이 남의 말은 무조건 틀렸다고 고함치는 무한에게 친절한 단어를 쓰고 싶지 않다.)


***


오캄의 빗자루


오캄의 면도날은 다들 알 것이다. 데닛은 '오캄의 빗자루'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이는 붐받이, 즉 잘못된 직관펌프다. 오캄의 빗자루는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물건이다. 간단히 말해, 자신의 주장에 불리한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빗자루로 쓱 쓸어서 양탄자 밑으로 감추면 끝이다. (양탄자 밑이라 하니 테스가 생각나는 것은 나뿐일까.)


그런데 이 빗자루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많은 과학자들이 실험 결과를 체리 피킹한다. 불리한 실험 결과를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다. 10여 개 국가의 데이터를 분석한 뒤, 자기 주장에 부합하는 7개국 데이터만 인용한, 그러니까 애초에 7개 국가만 연구했더니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다고 주장한 앤설 키스의 <7개국 연구>가 대표적이다. 지금도 세상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


스티븐 J 굴드


스티븐 J 굴드는 아주 유명한 진화과학자다. 단속평형론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냥 당연한 얘기에 거창한 이름을 붙인 것이지만) 진화과학에서 제일 유명한 이론 중 하나다. 그러나 그는 도킨스와의 싸움에서 줄곧 패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킨스를 비난('비판'이 아니다)하는 것으로 명성을 유지했다.


이 책의 한 챕터는 굴드가 자주 쓰는 억지 논리(붐받이)를 다루는 데 할애되어 있다. 챕터 이름은 '굴드의 꼼수 세 가지'다. 딱히 이름을 붙일 정도의 꼼수도 아니고, 굴드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것들이지만, 어쨌든 굴드에게 명예가 돌아간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에는 대니얼 데닛이 쓴 후기가 실려 있다. 과학자도 아닌 철학자가 쓴 후기인데, 말하자면 지적 능력이 뛰어난 제3자가 둘 사이의 논쟁에 나름 결론을 내린 셈이다.


데닛은 그저 서평을 쓰는 것으로 판정을 대신했다. (서평은 '책'에 대해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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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글을 읽다가, '당연하니까 넘어가겠다'라는 말이 나오면 긴장하라. 이거야말로 대표적인 붐받이다. 설명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이다.


ZWG3Rg2RsWe5BTyxjNVVtVhBH7pjO5DPW2sk4KLJ-tXDNoNTPQkcHyn5N49x3jgymM3BeMtqrcFJpE8Ga8QWag.jpg (c) 김성모


마찬가지로, 대답이 뻔함을 전제하는 수사의문문에 뻔하지 않은 대답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습관이다.


***


심오로움


역자가 이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챕터다. deepity라는 어이없는 단어를 역자는 '심오로움'이라 번역했다. deepth가 아니라, 'deep함'을 표현하고 싶다면 deepness라 쓰면 된다. 그런데 deepity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어 내고, 그것이 deepness와는 다른 어떤 (심오로운) 뜻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셰익스피어나 하이데거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기행을 왜 벌이는지 모르겠다. 언어란 소통 도구다.


***


지향계


자, 이제 데닛의 전공 분야인 마음의 이론, 특히 지향계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생각 도구'라는 부제를 달아 책의 내용을 오도하고 있는데, 이 책은 데닛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결국 지향계에 대한 연구를 통해 마음을 연구하는 내용이다.


조금 더 빡빡한 내용으로 옮겨가기 전에, 데닛의 멋진 인용구를 감상하며 잠시 쉬어 가자.


셀라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철학의 목표를 추상적으로 정식화하자면 최대한 광의의 사물이 어떻게 최대한 광의로 들어맞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이제껏 접한 철학의 정의 중에서 최고다. (16장 중)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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