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대니얼 데닛, <직관펌프> (2)
민간심리학
민간심리학(folk psychology)이라 데닛이 명명한 것은 내 생각에 '직관'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이) '으레 그렇게 생각하는 것' 정도라고 할까.
연구자들 중에는 민간심리학을 마음 이론(TOM, Theory of Mind)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데닛은 아니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TOM이라 대체해도 무방하다.
민간심리학은 우리가 공식 교육을 받지 않고도 능숙하게 발휘하는 재능이다. (17장 중)
예컨대 우리는 아무데서나 얼굴을 본다. 벽지나 얼룩은 물론, 빵이나 화성 표면에서도 말이다. 이것이 민간심리학이다. 정확히 말로 정의 내리기 어렵지만, 대략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이나 자연 현상에 어떤 마음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도, 민간심리학의 대표적 사례다.
민간심리학이 데닛에게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데닛 철학의 핵심 개념인 지향성과 연관되어 있어서다.
나는, 민간심리학을 쉽게 구사할 수 있고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사물을 단순하게 가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과학의 이상적 모형, 즉 최대한 추상적이고 본질만 남은 모형을 '닮았다.' 나는 이것을 '지향적 태도'라 부른다. (17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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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적 태도
지향적 태도란, 남(타자, 내가 아닌 모든 것)을 나와 유사하게 생각하는 태도다. 앞서 말한 얼굴 탐지가 한 예다. 더 두드러지는 예는 마음 탐지다. 우리는 온갖 것들에게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번개가 쳐도, 태양이 달 그림자에 가려도, 비가 내리거나 안 내려도, 그런 현상들에 어떤 마음이 개입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이것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닌데, 데닛은 컴퓨터와 체스를 두는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체스 컴퓨터는 알고리즘에 따라 작동한다. (이 책은 알파고가 나오기 훨씬 전에 나온 책이다. 당연히 당시 체스 프로그램은 규칙 기반 인공지능이었다.) 알고리즘은 마음과 다르다. 그러나 체스 선수는 컴퓨터를 체스 선수처럼 생각하고, 그의 수, 즉 마음을 읽으려 노력한다. 이것이 민간심리학의 대표인 지향적 태도의 한 사례다.
이 경우, 지향적 태도를 가지지 않고 컴퓨터와 체스를 두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상대방을 합리적 행위자로 '가정'하지 않고 체스를 두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잠깐 삼천포로 빠지자면, 이세돌이 알파고를 상대로 이긴 1승은 바로 이 지향적 태도를 버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세돌의 전략은 말하자면 알고리즘의 허를 찌른 것인데, 다시 말해 알파고가 실은 체스 선수가 아니라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스타크래프트에서 컴퓨터와 경기를 할 때 일꾼 한 마리를 적진으로 끌고 가서 적 일꾼 전부를 양 몰듯이 몰고 돌아다니며 이기는 방법과 유사하다.) 수많은 패턴을 학습한 알파고의 메모리에 이세돌의 기발한 한 수는 없었다.
각설하고, 데닛의 중요한 이야기는 이어진다. 어떤 대상에 대해 지향적 태도를 취해 그 대상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대상은 지항계(intentional system)다. 쉽게 말해, 마음이 있다고 가정했더니 대상의 행동을 더욱 잘 예측할 수 있었다면, 그 대상은 마음이 있다고 봐도 좋다는 것이다. (데닛은 지향계와 마음의 관계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므로, 정확하게는 그저 '지향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정도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쉽게 말해'라는 표현을 쓴 김에 그냥 한걸음 더 나간 표현을 썼다.)
데닛은 지향적 태도를 설명하기 위해, 대상을 대하는 태도를 3가지로 구별한다. 즉, 물리적 태도, 설계적 태도, 지향적 태도다. 상당히 직관적인 구분이다. 각각 돌 덩어리, 자동차, 그리고 인간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또한, 지향적 태도는 근본적으로 설계적 태도의 부분 집합이라는 사실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데닛은 결코, 설계적 태도와 지향적 태도의 차이에 영혼이나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데닛의 평생 과제가 마음의 정체 규명임에도, 그렇다.) 데닛에 따르면, 설계적 태도는 물리적 태도로 설명 가능하다. 다만, 물리적 태도로 환원해 설명하는 것보다 설계적 태도로 설명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뿐이다. 어떤 화학 작용을 물리학으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화학으로 설명하는 것이 훨씬 쉬운 것과 마찬가지다. 9*9를 구구단으로 해결하는 것이 9를 아홉 번 더하는 것보다 쉬운 것과 마찬가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자세한 설명이 뒤에 이어지므로, 나중에 다루겠다.)
예측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겼을 때, 지향적 태도를 이용하면 뇌 하위체계의 '능력'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자세히 알기 전에라도 이 능력의 규격을 알아낼 수 있다. (18장 중)
추상적으로 표현했지만, 예컨대 체스 프로그램을 알고리즘 덩어리 대신 체스 선수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알기 쉽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개리 카스파로프는 (천재인 그가 실제로는 알았을 수도 있겠지만) 딥블루의 알고리즘을 알지 못해도, 딥블루를 체스 상대라 생각하고 게임을 진행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