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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비트 기계와 쿼터 발보아

[책을 읽고] 대니얼 데닛, <직관펌프> (4)

by 히말

2비트 기계와 쿼터 발보아


자, 이제 이 책에 등장하는 가장 강력한 비유를 만날 차례다. '2비트 기계'라는 이름의 동전 판독기다. 이것은 존 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본래적 지향성'(영혼을 멋지게 부르는 말이다)을 반박하기 위한 사고 실험이다.


투입된 동전이 25센트 짜리인지 판독하는 장치를 2비트 기계라고 부르자. 콜라 자판기에 설치해서 투입된 물건이 25센트 동전인지 파악하는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장치는 발보아 쿼터, 즉 파나마의 25센타보 동전(쿼터 발보아)도 정답으로 판독한다. 모양, 질량, 재질 등이 비슷해서다. (데닛에 따르면 파나마 25센타보 동전을 만들어 공급하는 것이 미국 조폐국이다.)


미국보다 시장이 훨씬 작은 파나마의 콜라 자판기 업자는 굳이 25센타보 동전을 판독하는 장치를 새로 만드는 대신, 이걸 가져다 써도 좋을 것이다. 자, 이 장치는 파나마로 옮겨져 이제는 25센트가 아닌 25센타보 동전을 판독해 콜라를 내준다. 물론 이 장치는 한갖 기계일 뿐이므로, 자신이 지금 미국에 있는지 파나마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내지 관심도 없고) 판독 대상이 25센트인지 25센타보인지 여부에도 마찬가지 입장일 것이다.


이게 과연 괜찮은 일일까? 존 설과 그의 일당은 과연 뭐라고 말할까? 2비트 기계는 원래 25센트 미국 동전을 판독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는데, 지금 파나마 콜라 자판기 업자는 그 목적을 모독하고 있다. '본질'을 해친 것이다!


5f52804c7cab87.82466466-original.jpg 쿼터 발보아


쌍둥이 지구에 사는 동물, 맗


두 번째 사고 실험으로 넘어가자. 지구인 존이 잠든 사이에 외계인에게 납치당했다. 그는 모르는 사이에 '쌍둥이 지구'로 옮겨졌다. 이곳에는 그의 고향 집은 물론, 존의 가족도 그대로 존재하고, 모든 점에서 지구와 똑같다. 단지 말(horse) 대신 맗(schmorse)이 살 뿐이다. 맗과 말을 감각적으로 구분하는 방법은 없으며, 그 차이를 아는 방법은 유전체 전장 분석 밖에 없다.


잠에서 깨어난 존은 맗을 보고 뭐라 말할까? 당연히 말이라 말할 것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맗을 말이라 철썩 같이 믿고 있다. 누군가 그에게 이건 말이 아니라 맗이라 가르쳐 준다 해도, 그는 믿지 않을 것이다.


존 설과 그의 친구들에 따르면, 자신이 말을 본다고 생각하는 존의 마음 상태는 결코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본래적 지향성'의 사례로서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쌍둥이 지구에는 오직 맗이 있을 뿐이다. 그의 마음이 지향하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본래적 지향성이 있다면 그의 말에 대응하는 사실이 존재해야 하는데, 분명 그렇지 않다.


본래적 지향성의 개념 전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답이 준비되어 있지만, 전통적 직관에 맞설 기회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문제를 명쾌하게 표현하려면 세 번째 사고 실험이 필요하다. (29장 중)


거대로봇


세 번째 사고 실험은 어디에서 많이 보던 것이다. 25세기의 삶을 경험해 보고 싶은 나는 동면에 들어가 400년 후에 깨어나고 싶다고 결정했다. 그런데 400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아는가? 기후변화로 동면실이 물에 잠길 수도 있고, 지진으로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동면실을 거대 로봇에 넣는다. 그래서 동면실을 품은 그 로봇은 외부 환경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여 동면에 들어간 나를 400년 동안 보호하게 된다.


나는 동면에 들어가기 전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로봇의 행동 지침을 만든다. 로봇의 궁극적인 목표는 동면실에 잠들어 있는 나를 400년 동안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로봇 자신이 살아 남아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로봇의 결정은 때로 나의 목표와 어긋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로봇의 지향적 태도와 행동이 모두 나의 목적에서 파생된 것임에도 나의 목적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음에 주목하라. (29장 중)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 한 권을 통해 보여준, 유전자와 그 운반 기계에 관한 비유와 정확히 같다. 21세기 인류는 유전자의 프로그래밍을 거부하며 결혼과 출산을 꺼리고 있다. 유전자의 '본래적 지향성'이 실패한 것이다.



본래적 지향성이라는 마법적 요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본래적 지향성'이 정말 있어야 하나? 그 어떤 방법으로도 관찰 불가능한 이 개념을 넣어야 지향계가 설명된다고 하는 존 설과 그의 친구들의 주장이 그럴듯한가?


파나마 콜라 자판기 업자가 25센트를 탐지하는 '본래적 지향성'을 가진 기계를, 그 동전과 비슷한 파나마 동전(25센타보) 탐지 능력 때문에 선택하고, 그 기계의 본래적 지향성에도 불구하고 '25센타보 탐지 장치로 활용하듯,


진화는 어떤 기관을 혈액에 산소를 공급하는 능력 '때문'에 선택하고 그것을 폐'로서 ' 지정할 수 있다. 행동, 행위, 지각, 믿음을 비롯하여 민간심리학의 모든 범주는 이런 설계의 '선택' 또는 진화가 보증한 '목적'- 존재 이유 -에 대해 상대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29장 중)


명문장이 자꾸 나와 인용이 너무 많지만, 또 인용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머니 자연의 마음을 읽고자 해도 우리에게는 해석할 텍스트가 없다. (29장 중)


그 어떤 방식으로도 지각할 없는 어떤 개념(본래적 지향성, 영혼)이 설사 정말 존재하고, 그것이 그 지향계의 본질적 지향성의 근원이라 해도, 우리는 그걸 파악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이 견해는 불가지론이 아니다. 그런 에테르 같은 개념 없이도, 우리는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으로 하면 간단히 설명되는 태양계를,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으로 하여 훨씬 더 복잡하게 설명할 이유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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