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대니얼 데닛, <직관펌프> (7)
솔직히 말해, 내가 이렇게까지 길게 이 책을 리뷰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무슨 숙제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복습의 효과는 확실히 대단하며, 대니얼 데닛은 역시 재미있다.
자유의지란 존재할까
스티븐 호킹이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자유의지가 환상이라 말했고, 일부(다수!) 철학자들은 이 위대한 과학자들이 틀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대개 존 설, 데이비드 차머스 같은 부류다. 우주가 끝날 때까지도 과학으로 알아낼 수 없는 어떤 신비한 무엇이 존재한다고 '믿는' 이들이다.
말은 바로 하자. 색의 민간 이데올로기는 헛소리다. (7부 인트로 중)
데닛은 사람들이 말하는 종류의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내 맘대로 할 수 있어!)과 다른 자유의지가 존재하며, 그것은 도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유의지는 색깔만큼 현실적이고 달러만큼 현실적이다. (7부 인트로 중)
게임 이론이란 기본적으로 두 지향계의 대결을 시나리오로 만든 것이다. 물론 이들 지향계의 핵심은 자유의지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즉 다음 수를 들키지 않는다는 가정이 없다면, 게임이란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이 게임 이론이 가장 성공적으로 활용된 학문 분야는 진화과학이다. 다시 말해, 수많은 게임이 진행되어 왔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란 말이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상대방을 마음이 있는 어떤 존재로 가정하면 전략 수립에 유리하다. 복잡한 선택 기계를 상대하는 것보다, 마음이 있는 존재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 훨씬 쉽다. 그래서, 수많은 동물들의 본능에는 상대의 마음(전략)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이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부작용도 나타났다. 명백히 마음이 없는 곳에서 마음을 발견하는 현상이다.
이 본능적 반응으로부터 온갖 보이지 않는 요정, 도깨비, 귀신, 신, 그리고 궁극의 불가시 지향계인 유일신이 (진화 과정에서) 발명되었다. (67장 중)
실질적 예측 불가능성으로 충분하다
데닛은 절대적 예측 불가능성과 실질적 예측 불가능성을 구분한다. 많은 철학자들이 믿어온 명제, 즉 자유의지란 절대적 예측 불가능성이다, 라는 명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책의 초입에 나왔던 '셈이다' 연산자로 충분하다. 실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자유의자와 다르지 않다.
나는 우리가 - 진화 자체와 마찬가지로 - 최대한의 '실질적' 예측 불가능성을 갖출 만큼 똑똑한 이유를 밝혀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달라. (67장 중)
다들 알다시피,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복권이 있다. 추첨 상황을 공개하는 방식의 사후적 복권, 그리고 긁기만 하면 추첨 여부를 즉각 알 수 있는 사전식 복권이다. 추첨이 사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추첨 행사를 공개하는 이유의 큰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리 승자가 정해져 있는 추첨도 인정하며, 둘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 즉석 복권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두 가지 복권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사실상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객관적으로는 물론 사람들의 인식상, 즉 주관적 관점에서도) 사실에서, 우리는 결정론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애초에 운명이 정해져 있다 해도, 그걸 모르는 우리에게 그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자유의지가 있는 '셈이다.'
몰라서 착각한다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문제 되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책임 소재 때문일 것이다. 살인자가 자신에게 자유의지가 없었다, 모든 것이 원래 그렇게 될 운명이었으므로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달리 행동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데닛은 '비활성의 역사적 사실'이라는 범주를 설명한다. 비활성의 역사적 사실이란, 과거에 분명히 (역사로서) 성립했던 사실이지만, 지금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도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사실을 말한다. 데닛이 즐겨 드는 예는 이것이다.
내 금니의 일부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것이었다. (69장 중)
이 명제는 분명히 참 아니면 거짓이다. 그러나 그것을 확정적으로 알아낼 방법은 없다. 데닛은 심지어 관찰의 양자역학적 한계를 들이댄다.
비활성의 역사적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과거와 미래의 정의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를 알지만, 미래는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가 불확정적이며,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는다.
자유의지가 없는데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다음에 나오는 사례는 두 컴퓨터의 체스 대결이다. 겉보기에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대결이, 사실은 사전에 정해진 시나리오의 재생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객인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체스 대결 당사자들의 입장을 살펴보자. 체스 프로그램 A와 B는 각각 체스 프로그램 챔피언인 C와 100번 연속으로 대결을 벌이고, 모두 패한다. 100전 100패다.
그런데 체스 프로그램 A는 B보다 추론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A는 (체스의 특수 행보인) 캐슬링을 고려했지만, B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실제로 두 프로그램은 모두 캐슬링을 하지 않는 선택을 했다. 겉보기에는 같은 결과다. 즉 같은 행동을 했다.
실제로는 둘 다 캐슬링을 하지 않았지만, A는 추론 시간 제약 때문에 캐슬링이라는 옵션을 포기하고 정석대로 플레이한 반면, B는 그 상황에서 캐슬링을 옵션의 하나로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A는 캐슬링이 가능했고, B는 캐슬링이 가능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둘 다 캐슬링을 하지 않았지만, A는 할 수도 있었던 반면, B는 그런 가능성조차 없었다.
캐슬링을 하지 않은 것이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가정하자. 즉, 그 순간 캐슬링을 했다면 패하지 않을 경기였다. 이 경우, A에게는 캐슬링을 하지 않은 행동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캐슬링이 능력 밖이었던 B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대개의 사람들은 두 경우가 다르다고 느낄 것이다.
이것을 살인자의 예에 적용해보자. A와 B라는 두 살인자가 있는데, A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 당시 우주 원자들의 배열 상 다른 선택이 불가능해서 (즉 외부 상황이 하필 그렇게 펼쳐져서) 살인을 했고, B에게는 그런 선택을 할 여지 자체가 없었다. 이 경우, 실제로는 둘 다 살인을 했지만 살인에 대한 책임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B는 유전적 장애로 지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고 가정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러니 비결정론이 참이기를 바랄 이유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비결정론이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바랄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70장 중)
두 체스 프로그램은 달리 행동하면 100전 100패를 면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데닛은 체스 프로그램 사고 실험으로 '달리 행동할 수 있었다'라는 것이 비결정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철학자가 늘 그렇듯, 추가 설명을 계속한다.
'절대적 포유류'여야만 포유류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절대적 책임'이 있어야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71장 중)
데닛이 하고 싶은 말은, 절대적 자유의지가 없다 해도, '실질적' 자유의지만으로 충분히 책임 추궁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