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대니얼 데닛, <직관펌프> (8)
다이얼을 조금씩 돌려보기
이제 72장에 등장하는 신경외과 의사의 사례를 살펴보자. 한 신경외과 의사가 몰래 환자의 뇌에 장치를 심었다. 그는 환자의 결정을 미리 알 수 있으며,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장치를 원격 조작하여 환자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 이 환자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 걸까?
그런데 만약 내가 식탐을 고치기 위해 의사에게 이 장치를 심어달라고 했다면 어떨까? 내가 식탐으로 간식을 향해 손을 뻗을 때마다, 의사는 버튼을 눌러 내가 그러지 않도록 행동을 바꾼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서, 나는 간식을 쳐다보지도 않게 되고, 더 나아가 내 뇌에 장치가 심어져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된다. 하지만, 애초에 이 장치를 뇌에 심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나다. 그렇다면 이 모든 행동은 나의 자유의지인가, 아닌가?
73장은 또다른 사고실험을 보여준다. 어떤 과학자가 소년을 창조했는데, 소년은 필요를 달성하는 데 있어 살인을 하나의 정당한 수단으로 생각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소년이 드디어 살인을 했다고 가정하자. 사람들은 소년보다 과학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데닛은 묻는다. 이는 좋은 직관펌프일까, 아니면 붐받이일까? 정답은 붐받이다. 잘못된 사고실험이란 말이다. 왜 그런지, 데닛은 설명한다. 다이얼을 조금씩 돌리면서 과연 이 명제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민간심리학으로 어떻게 판단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명제: 어떤 과학자가 소년을 창조했는데, 소년은 고의로 어떤 범죄(무산된 마약거래에서 저지른 살인)를 저른다.
첫 번째로, 데닛은 '어떤 과학자'를 '무심한 자연'으로 바꾼다.
명제: 무심한 자연이 소년을 창조했는데, 소년은 고의로 어떤 범죄(무산된 마약거래에서 저지른 살인)를 저지른다.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데닛은 더 나아간다. 두 번째로, '고의로'를 '매우 높은 확률로'로 바꾼다.
명제: 무심한 자연이 소년을 창조했는데, 소년은 매우 높은 확률로 어떤 범죄(무산된 마약거래에서 저지른 살인)를 저지른다.
세 번째, 범죄의 조건을 바꿔보자.
명제: 무심한 자연이 소년을 창조했는데, 소년은 매우 높은 확률로 어떤 범죄(횡령을 감추기 위한 살인)를 저지른다.
애초의 명제에서 우리는 소년에게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사실 이 소년은 하버드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리먼브러더스에 취직했다가 미모의 꽃뱀에게 빠져 돈을 마련하기 위해 회삿돈을 횡령했고, 횡령을 감추려고 살인을 저질렀다. (하버드와 리먼브러더스, 꽃뱀은 모두 데닛의 표현이다.)
나름 재미있는 사고실험이다. 그러나 이런 유희를 생략하고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유전자의 운반기계이며, 유전자의 프로그래밍에 따라 행동하지만, 우리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유전자의 당초 계획, 즉 복제와 전파라는 전략 역시 망테크를 타게 되므로, 유전자도 책임을 지는 '셈이다.')
결론 - 자유의지는 없지만 책임은 있다
자유의지라는 난제를 풀어보겠다는 데닛에게 환호한 것을 생각하면, 명쾌하지 못한 결말은 왠지 씁쓸하다. (결정론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데까지는 좋았으나, 그걸 도덕적 책임과 연결짓는 부분이 조금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자유의지라는 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착각, 즉 궁극적으로 내가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수준의 자유의지가 없다면 책임도 없다는 식의 사고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 자유의지는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그런 수준의 자유가 아니며, 그런 제한된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는 것이 데닛의 (현 시점에서의) 결론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물리학자의 견해를 살펴보자.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과 욕망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다. 그러나 자신이 무언가를 원하고 선택하게 만드는 원인에 대해서는 모르며, 그러한 원인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썼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저 자신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원인을 모르는 것일 뿐이다.” (카를로 로벨리, <화이트홀>, 3장 6절 중)
카를로 로벨리가 말하는 핵심은 자유의지의 부정이다. 그러나, 자유의지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자유의지를 오해하고 있다는 점도 그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자유의지에 관한 데닛의 주장의 핵심도 바로 그것이다. 비트겐슈타인 의문의 1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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