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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l 15. 2018

이건 뭐, 부록 보고 사야하는 책이네

[느낌]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삐에르 메나르라는 가상의 인물을 창조한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그대로 필사했지만, 새로운 작품을 또한 창조한 삐에르 메나르. 보르헤스는 삐에르 메나르라는 액자를 통해, 마치 진실을 보여주듯 허구를 보여준다.

<캔터베리 이야기>로 유명한 시인 초서는 말년에 <철회(retraction)>란 작품을 썼다.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신성모독에 대해 깊이 사죄한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초서 연구가의 99%는 이 작품이야말로 초서의 최후 최고의 풍자라고 해석한다. 이 작품은 초서의 작품 전체에 대한 일종의 액자이자, 에필로그다.


제프리 초서. 한 평생 '불경한' 이야기를 쓰고는 '잘못했습니다'라는 작품을 발표하는 너스레를 떠는 그는 역시 풍자의 달인이다.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한 폭주족 리더에 관한 소설이다. "어? 이게 끝이야?" 하는 순간, 작가가 1인칭으로 말하는 일종의 에필로그가 달려 있다. 길기도 하다. 작가가 대학 때 알던 Y는 청소년들을 위한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필요하다는 중고 팩스기를 사 들고 작가는 그녀를 찾아간다. 그녀는 동규라는 아이를 만나 보라고 한다. 동규에 이어 목란, 박 경위를 만나고, 제이의 실체를 뒤쫓는 작가. 취재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 동규는 자살하고, 목란은 유학길에 오른다. 에필로그의 역할까지 충실히 하는 이 긴 사족의 정체는 뭘까?

폭주족 리더 제이가 경찰의 방어막에 걸려 넘어지면서, 하늘로 승천하는 것이 이 소설의 결말이다. 이런 결말을 뒤따르는 에필로그라면, 이야기의 진실성을 위장하려는 일반적인 액자소설 장치와 같은 역할을 노린다고는 볼 수 없다. 왜 작가는 제이의 승천이라는 이야기의 절정에서 소설을 끝맺지 않았을까?


에필로그는 길기도 하지만, 상당히 재미있다.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제이에게 다가가는 작가의 여로는 상당히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Y라는 인물과 관련해서는 한 차례 반전까지 일어난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에필로그를 그냥 버리기가 아까웠던 건 아닐까? 더구나 이 액자 장치는 후일담에 대한 궁금함도 해소해준다. 이야기의 절정에서 소설을 끝맺고 나서, 에필로그만 덩그렇게 붙였다면, 그건 상당히 맥없는 사족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취재 과정을 에필로그에 녹여 넣었다. 그것도 자신의 젊은 시절 연인과 소설 속의 인물들을 연결해 가면서 말이다. 그 결과는 서스펜스 드라마다. 이쯤 되면, 버리기 아까운 것은 물론이고, 세상에 반드시 공개해야 하는 훌륭한 작품 아닐까?

이 소설은 특별히 대단한 작품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 달려 있는 에필로그, 그리고 그 에필로그와 소설 본체가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정말 대단하다고밖에는 평가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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