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류츠신, <삼체0: 구상섬전>
시작은 기묘하게
시작은 <삼체1>과 같이 미스터리한 느낌이다.
<삼체1>이 추리소설 같은 접근이었다면, 이건 그냥 미스터리다.
특히 구상섬전의 출현과 함께 주인공의 부모님들이 산화하는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신비롭기만 하다.
신비로운 오프닝에 이어, 류츠신의 장기인 과학이 등장한다.
구상섬전에 관한 다양한 학설,
피뢰침이 번개를 중화시키는 기전을 인류가 아직 이해 못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구 소련 과학자가 들려주는 구상섬전 무기 개발 실패의 역사가 이어진다.
그리고 드디어, 물리학자 딩이가 등장하면서 소설은 과학에서 상상력으로 나아간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시작은 상상력이었다.
구상섬전은 번개 현상이 아니라,
원래 존재하는 구형 '구조'가 대기 중의 전하를 만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 구형 물체는 전자다.
“구상섬전은 번개에 의해 생성된 것이 아니라 자연계에 이미 존재하는 구조예요.”
“번개는 그저 그것에 불을 붙이거나 촉발하기만 했을 뿐이라는 뜻이에요?” 린윈이 물었다.
“정확해요. 전류가 전등을 환히 밝히지만, 전등 자체는 이미 존재하는 것과 같아요.” (중반부)
거시 차원에서 관측가능한 크기지만, 단 한 개의 전자,
그래서 '굉전자(宏電子)'라 부른다.
딩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공간뿐이라 말하면서,
공간이 천이라면, 물질은 그 천에 존재하는 주름 같은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전자와 같은 입자의 크기는 주름지는 정도에 따라 거시적으로 커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카를로 로벨리의 루프양자중력 이론을 떠올리게 하는데,
나중에 굉원자핵을 한 줄의 현(string)처럼 생겼다고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영향을 받은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물론 일반적인 초끈이론도 string을 다룬다.)
중반부는 황당하게
린윈, 그리고 딩이가 등장하며 진행되는 중반부는 황당하다.
류츠신이라는 작가의 상상력은 끝을 모른다.
류츠신 상상력의 절정이라면, <삼체3>에 등장하는 빛의 속도 제한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구상섬전의 정체가 굉전자였다는 것부터가 황당하지만,
구상섬전 무기는 양자적 중첩을 배제하기 위해서 가시거리에서 발사해야 한다든가
굉원자핵을 초속 400미터 정도의 저속으로 충돌시켜 핵융합에 이를 수 있다든가 하는 전개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황당무계의 수준에 이르는 상상력의 정점에는
양자 그 너머의 세계가 있다.
사실 이 개념은 이 책의 핵심이자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개념은 시작 장면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구상섬전에 의해 부모님이 모두 산화한 다음,
주인공은 어머니의 흰 머리칼 가닥을 발견한다.
흰머리 하나를 뽑으면 7개가 난다고 농담을 하면서 뽑았던 흰 머리는 1가닥이었으나,
어머니가 산화된 다음 주인공이 발견한 것은 여러 가닥이다.
다시 말해, 저 너머의 세계에 존재하는 어머니의 흰 머리칼이다.
이 개념은 이후에도 계속 등장하는데,
장빈 교수의 아내,
구상섬전에 의해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산화한 아이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물, 린윈에 의해 계속해서 드러난다.
바로 그 절정에 이르는 장면은
주인공의 꽃병에 저 너머 세계의 린윈이 가져다 놓은 푸른 장미다.
엔딩은 감각적으로
류츠신이라는 작가의 가장 대단한 점이라면,
일류 물리학자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그의 과학 역량이
일류 문필가와 겨루어도 전혀 꿀리지 않는 문학적 감수성과 공존한다는 점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은 감각적이다.
주인공은 보이지 않는 푸른 장미가 꽂힌 꽃병에 물을 준다.
아내는 빈 꽃병에 꽂을 꽃을 사오지만, 주인공은 그 꽃들을 쓰레기통 버리며 화를 낸다.
상상의 세계에 사는 남편 때문에 아내는 괴로워하고, 둘의 관계가 위험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
어느 날 문득 아이가 둘의 결혼 생활을 구원한다.
어느 날 아침 아이가 일어나 하품을 하며 말했다. “엄마, 책상에 있는 자수정 화병에 장미 한 송이가 꽂혀 있었어요. 아주 예쁜 파란색 장미였는데 엄마가 보자마자 사라졌어요.” (마지막 챕터, '양자 장미')
그리고,
이틀 뒤 아내는 밤에 논문을 쓰다가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그런데 새벽에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깨웠다.
“책상에서 자다가 깼는데 눈을 뜨자마자…… 장미 향기가 났어. 그 화병에서 나는 향기였어. 그런데 다시 맡으려고 했더니 향기가 사라졌어. 정말이야. 장미 향기가 틀림없어! 거짓말이 아니라고!”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 화병에 정말로 파란 장미가 꽂혀 있으니까.” 내가 말했다. (마지막 챕터, '양자 장미')
캐릭터 빌딩
류츠신의 또다른 장기는 캐릭터 빌딩이다.
린윈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는 소설 천 권에 한 번이나 등장할 것이다.
린윈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지뢰와 적군에 대한 적의를 키운다.
그 결과, 그녀는 베트남군의 대나무 지뢰보다 훨씬 더 악랄한 액체 지뢰를 만들고,
자신이 죽어서 (양자화되어) 적진에 침투하겠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녀는 액체 지뢰를 교전 중인 두 국가 모두에게 제공할 정도로 비도덕적이고,
두고 온 물건을 챙겨오겠다고 거짓말을 한 뒤, 자신을 체포하려는 아버지를 피해 굉핵융합을 저지른다.
그러나, 구상섬전에 부모님을 잃은 주인공을 위로하며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곡을 연주하던 것도 그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