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잡담

[책을 읽고] 호메로스, <일리아스>

by 히말

일리아스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이야기다.

삼국지 읽는 느낌으로, 여러 번 읽었다.

삼국지처럼 대단한 스케일도 아니고, 인물도 전략도 적지만,

영웅들과 신들이 한 무대에 나와 싸우는 것은 흥미로웠다.


그러나 점점 한 인물에게 빠져들게 되었는데,

프리아모스의 큰 아들, 헥토르였다.


헥토르는 트로이군 최고 전사이지만,

그의 무용은 아킬레우스는커녕 아이아스에게도 밀린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지는 싸움이지만,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서야 하는 그의 고뇌.

그것이 나를 빠져들게 했다.



너무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


일리아스를 너무 좋아해서, 한 때는 게임을 만들려고 했다.

(동학농민전쟁도 게임 디자인을 하다가 그만둔 적이 있다.)


삼국지 같은 스타일이지만, 진영이 두 개뿐이고, 등장 인물도 훨씬 적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캐릭터들을 디자인하다 보니, 등장인물이 적은 것보다 불균형하다는 게 더 문제였다.


헬라스 -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아이아스, 오디세우스, 디오메데스, 네스토르, 아이아스2, 파트로클로스

일리움(트로이) - 헥토르, 아이네이아스, 파리스, 데이포보스, 사르페돈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어봐도 격차가 너무 크다.


신들을 고려하면 그나마 좀 균형이 맞는다.


헬라스 -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 헤파이스토스, (헤르메스)

일리움 - 아프로디테,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애초에 이 전쟁이 시작된 계기가 '파리스의 심판'이고,

승자 아프로디테를 제외하면 파리스가 웬수로 보일테니, 아테나와 헤라는 당연히 저쪽이다.


제우스는 <일리아스>의 스토리 진행 기간 동안은 대체로 트로이 편인 것처럼 보이지만

(마누라가 자꾸 헬라스 쪽 편을 드니 그에 대한 반작용도 있다)

트로이 전쟁 전체로 보면 중립이라고 보는 게 맞다.


전쟁의 신 아레스가 일리움 쪽에 있어 뭔가 있어보이지만,

일리아스를 읽어보면, 아레스는 아테나에게 매번 쪽도 못 쓰고 털리는 약한 존재다.

(가끔 인간들한테도 털린다.)


(전쟁에 아무 도움 안 되는) 아프로디테는 트로이 쪽인데,

남편 헤파이스토스는 헬라스 쪽이고, 오히려 애인 아레스가 자기 편이다.

(편들어 봤자 도움도 안 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헬라스 쪽에 있다보니,

강의 신들은 대체로 트로이 쪽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 강들이 트로이 땅에 있는 강들이라서 그런 거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대결은 원래도 아킬레우스의 우위지만,

헥토르의 창을 막아내는 것은 헤파이스토스의 방패이고,

(아폴론의 비호를 받아) 도망다니던 헥토르를 기만하여 싸움으로 이끄는 것은 아테나다.

그냥 싸워도 아킬레우스가 이기는데, 신들까지 도와준다.


트로이 쪽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신은 아폴론 정도다.


결과적으로, 나는 게임 만들기를 그만두었다.


achilles-vs-hector.jpg (c) Warner Bros


영웅들의 최후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를 죽인 아킬레우스도 곧 죽는다.

그것도 늘 겁쟁이라고 놀림 받던 파리스에 의해서다. (아폴론이 도와주기는 하지만.)


파리스는 아킬레우스를 화살로 죽였지만, 자신도 화살에 죽는다.

(그를 죽이는 인물은 듣보잡이라 패스한다.)


삼국지로 치면 장비 급 정도 되는 아이아스는 무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두고 경쟁하다가 오디세우스에게 밀리니 화가 치밀어서 그랬다고 한다.


사르페돈은 파트로클로스에게 죽는데,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게이) 파트너로,

전쟁을 하러 온 게 아니라 아킬레우스에 그냥 딸려온 사람이다.

그런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 갑옷 좀 빌려 입었다고 사르페돈을 죽인다니, 옷이 날개인가.


데이포보스는 프리아모스의 아들이니, 트로이 함락과 함께 죽은 것이 당연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트로이 측에서 살아남은 유의미한 인물이라면 역시 아이네이아스다.

그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의 주인공이 되어 무려 로마를 세운다.

(나중에 그 베르길리우스를 관광 가이드로 부려먹으며 단테가 연옥과 지옥을 여행한다.)


전쟁 후에 죽은 인물들 중 가장 극적인 것은 아가멤논이다.

시인 W. B. 예이츠도 <레다와 백조>의 만남의 종착역이 아가멤논의 죽음이라 하지 않았던가.


아가멤논은 와이프를 10년간 방치한 대가로, 그녀와 정부에게 살해당한다.

희곡 <오레스테이아>에서 유추해 볼 때, 아가멤논의 와이프 클라이태메스테라의 애호 무기는 도끼였으니,

아가멤논의 죽음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아이스킬로스의 대표작,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시작이 되는 사건이다.

<오레스테이아>는 생물학적 관점에서도 의미가 있는데,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자녀의 유전자가 100% 아버지에게서 온다고 믿었다는 사실이 잘 나와 있어서다.

(무려 재판에서 근거로 인용된다.)


나중에 헬라스를 제패할 스파르타의 군주, 메넬라오스는 귀향해서 잘먹고 잘살았다.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이 되는 오디세우스 역시 잘먹고 잘살았다.

(최후는 오이디푸스 생각나는 게 좀 그랬지만.)

다만, 집에 오는 길이 멀고 험악해서 고생을 좀 했을 뿐이다.


그 고생은 헛되지 않았으니,

<오디세이아>는 <일리아스>보다 훨씬 더 인기가 있으며,

제임스 조이스는 그 위명을 빌려 훨씬 더 재미없는 <율리시즈>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뭐, 이 소설은 독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비평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썼다니, 할 말은 없다.)


0deb42bf-1e67-45ba-b752-f888d3d1afb2.png from nanobanana


문화 파워


요즘 K-culture가 아주 핫하다.

청나라는 중원을 정복했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중국 문화뿐이다.

로마도 그리스를 정복했으나,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점령당했다.

로마에서 웬만한 귀족 자제들은 그리스 유학이 기본 코스였다.


소크라테스는 <변명>에서 희곡이 쓰잘데기 없는 짓이라고 말했지만, (물론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 희곡들은 로마를 너머 유럽과 세계를 정복했다.


<오이디푸스>가 없었다면 프로이트가,

<오레스테이아>가 없었다면 페미니스트들이,

<오디세이아>가 없었다면 전 세계 어린이들이 섭섭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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