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사랑

[책을 읽고] 죽지 않고 어른이 되는 법

by 히말

***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소설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거창한 제목의 이 책은, 펼치자마자 아쉽게도 환생에 관한 소설이다.

시작부터 주인공 꼬마(아기)는 자기가 여섯 번 죽고 환생하여 지금 일곱 번째 삶에 도전하는 중이라고,

(무려 부모님에게) 브리핑한다.


한 번 환생하는 것으로는 성이 안 차, 102875차 환생이 어쩌구 하는 웹소가 판을 치는 요즘이다.

일곱 번째라면, 그다지 과하지도 아니다.


더구나, '세르게이의 N회차 인생'이라는 제목의 괜찮은 소설도 만난 적 있다.

속는 셈 치고, 읽어보자.



의외의 전개


일곱 번째 환생이라는 점이 시작부터 나왔으니,

이미 지나간 여섯 번의 실패담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전개다.

시시한 전개와 진부한 디테일에 지쳐간다.


그러다가 문득, 눈이 확 떠진다.


주인공 재이의 환생에 엮여 있는 한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사람이 이미 늙어버린 육체를 가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상담사 정소영.

그녀는 재이의 첫 번째 죽음 시점에서 환청을 듣고,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온다.

그리고 두 번째 삶을 살던 재이를 상담 대상으로 만난다.


흔해빠진 환생담이지만, 일단 한 가지는 확실히 다른 요소가 들어 있는 새로운 맛이다.

늙은 몸으로 시간을 거스르는 그녀는 과연 어떤 활약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죽지 않을까


제목 대로, 주인공은 자꾸 죽는다.


첫 번째 죽음은 할머니의 실수로,

두 번째 죽음은 어머니의 방치로,

세 번째 죽음은 아버지의 방화로,

네 번째 죽음은 소아성애자의 살인으로.


그러는 과정에 개입하는 의문의 소년 준서.

그는 가끔 로봇 모드에 돌입하여 계시와 같은 말들을 던지는데,

돌아보면 그것은 재이의 죽음에 관한 예언이었다.


재이는 그가 자신의 구원자라 생각하고,

그의 예언에 의지하여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힘겨운 싸움


주인공 재이의 환생이 멈춰야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소영은 그녀를 돕는다.

재이가 죽지 않고 어른이 되면,

2005년 20대 후반이었던 자신의 몸을 되찾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에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다.

(달리 생각할 방법도 없지 않은가.)


재이 어머니가 초등학교 동창을 다시 만나 바람을 피우지 않도록,

재이 아버지가 사고를 치고 직장에서 잘려 가족들을 죽이고 자살하지 않도록,

그리고

소아성애자인 선생이 재이에게 성추행을 시도하다가 또다시 그녀를 살해하지 않도록.


소아성애자 선생을 두 번째로 죽이는 데 성공한 그녀는 이미 70대에 가까운 몸이다.

그런데도 재이는 어른이 되기 전에 죽고 말았다.


언덕길을 내려가기에도 벅찬 몸이 된 그녀가 다음 생에 재이를 도울 수 있을까?



그렇게, 어른이 된다


일곱 번째 생에서, 순조롭게 어른이 되어가던 재이는 어느날 꿈속에서 소영을 만나 울부짖는다.


"내 구원자는 소영쌤이었어. 그걸 몰랐어."

"아냐, 네가 내 구원자였는 걸."


깨어난 재이는 부정맥으로 쓰러졌었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이후, 별일 없이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한다.

이미 정소영이라는 이름도 잊은 지 오래다.


계속해서 임신에 실패하던 재이는 상담을 받으러 가서

정소영이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심리상담사를 만나고,

(원래의) 정소영이 썼다는 소녀 J의 상담 기록 문서를 받는다.


(심지어 두 정소영은 같은 대학원을 다녔다고 한다.)


그 상담기록에는,

죽지 않고 어른이 되기 위해 싸워왔던

재이, 또는 J, 또는 수많은 다른 소녀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이렇게, 소녀들은 죽지 않고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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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랑


소아성애자 살인범을 죽이고 자살하려던 소영은,

굳이 죽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에 도피하여 살아간다.

늙어버린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궁핍하게 살아가지만,

멀리서 잘 크고 있을 재이를 생각하며 홀로 웃음짓는다.


이제 일어섰겠구나, 이제 말을 시작했겠구나, 지금은 유치원에 들어갔겠구나.

가끔은 멀리서 재이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기도 하면서.


어쩌면, 모든 것을 앗아간 장본인이다.

그런 재이의 '평범한 삶'을 위해서,

소영은 모든 것을 희생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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