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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ug 08. 2018

편지 단 한 개로, 인물이 살아난다

[생각] 조디 피코의 <19분>

소설가는 인물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대개, 인물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면 그 인물은 살아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소설가는 몇몇 주인공을 제외하고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지 못한다. 그래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살아나지 못한다.

조디 피코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대단한 작가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녀의 이야기는 대개 결말이 부실하고, 그다지 기억에 남는 것도 없다. 드라마 만들기에 적당하고, 독서 토론이나 그냥 점심 먹고 잡담하기에는 적당한 소재일지 모르지만, 논문 쓰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글은 사람을 끌어 당긴다. 매번 400쪽이 넘는 분량이지만, 일단 잡으면 손에서 놓기가 어렵다. 읽는 도중에 사람을 몇 번이나 놀래킨다. 반전으로 놀라는 경우도 있고, 기가 막힌 인물을 창조하거나, 마법 같은 묘사를 하기도 한다.

스털링 고등학교의 피터 호튼. 유치원 때부터 시작된 집단 괴롭힘의 끝에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난다. 락커룸, 화장실, 식당... 그는 괴롭힘을 받았던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적'들을 처치한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던 어느날, 그는 간수에게서 편지를 받는다. 또, 어떤 기레기가 보낸 함정 편지인가? 그런데 이 편지는 손글씨에, 오렌지 냄새가 난다.

친애하는 피터,

넌 나를 모를거야. 난 9번이야. 내가 스털링 고등학교에서 빠져나올 때, 구급대원이 이마에 번호를 매겼거든. 난 재판에 참여하고 있지 않으니 방청석에서 날 찾으려 하지 마. 부모님은 내 상태를 보시고, 미네소타로 이사를 왔어. 다음 주부터 등교인데, 나보다 내 소식이 더 빨리 도착했나봐. 여기 사람들은 나를 스털링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피해자라고만 생각해. 내 취미, 성격, 과거에 사람들은 관심이 없어. 네가 내 정체성을 만들어 줬네.

넌 나를 뒤에서 쐈어. 내가 돌아보기라도 했다면 지금 휠체어 신세일텐데, 정말 다행이라고 의사가 그러더군. 내 부상은 대단치 않아. 깜빡 잊고 탱크탑이라도 입으면, 총상 흔적, 가슴에 튜브, 그리고 꼬맨 자국이 보이지만 뭐 어때. 사람들이 나를 쳐다볼 때 얼굴 말고도 더 볼 것이 생긴 것뿐이야.

내 성적은 평균 4.0이었지만 뭔 상관이야. 예전엔 꿈도 많았지만 이제는 내가 대학을 가야는 하는지도 잘 모르겠어. 뒤에서 걸어 오는 사람이나, 문이 쾅 닫히는 소리도 견디기 힘들어.

너에 대해 많이 생각해. 난 네가 감옥에 가야 한다고 봐.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

불어 시간에 너를 봤었어. 넌 좀 묘한 구석이 있었지. 네가 웃는 모습이 좋았어. 우린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앤절라


읽고 나서, 피터는 편지를 접어 넣는다. 십 분쯤 지나 다시 꺼내어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동이 틀 때까지, 편지 전체를 외울 수 있을 때까지.

편지 한 장으로 조디 피코는 앤절라라는 인물을 살아나게 하고, 피터와, 이 장면 뒤에 재판에서 증언을 하는 피터의 어머니까지 살아 움직이게 한다.

인물을 살아나게 하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에 있어서, 조디 피코만한 소설가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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