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오만과 편견, 여름
너무 유명해서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읽은 적은 없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그리고 어쩌다 얻어 걸린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연속으로 읽었다.
<오만과 편견>은 워낙 유명하니 줄거리를 이야기할 것도 없다.
다아시의 독특한 매력, 그리고 리지의 톡톡 튀는 성격이 이 소설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여름>은 1913년 이디스 워튼이 발표한 소설인데, 뉴잉글랜드의 어느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젊은 여자의 단조로운 삶이 외부에서 등장한 한 남자에 의해 바뀌는 과정을 그린다.
이 소설의 결말은 그야말로 고구마다.
주인공 채리티는 하니(Harney)의 아이를 임신한 채 늙은 로열 씨와 결혼한다.
그 과정에서 생각을 곱씹게 만드는 장면도 있다.
채리티는 자기를 버린 어머니의 장례 때문에 "산 위"라는 일종의 향, 소, 부곡 같은 곳을 방문하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환경을 직접 목도하자
(경멸해 마지 않던) 로열 씨가 자신을 거둬준 일에 대해 묘한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로열 씨는 자기 딸 뻘인 채리티에게 지속적으로 구애를 하는데, 이건 은근 웃긴다.
아무리 신사다운 행동을 한 다음이라도 결론은 결혼하자는 '기승전-결혼'이라서 멋지기 직전에 망한다.
'바람의 전학생'이 주인공이듯, 사건의 중심은 외부에서 갑자기 등장한 청년, 루시우스 하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하니의 행동은 먹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그 외에도 수많은 소설에서 이미 수십, 수백 차례 등장한 일이고,
오랫동안 뭐가 잘못됐는지 독자들이 지적조차 하지 않았던, 아주 뻔한 클리셰다.
그러나 <부활>이나 <설국>과 달리 <여름>의 주인공 시점은 여자 쪽이다.
이 강렬한 '여름'은 하니의 여름이기도 하지만, 주인공 채리티의 여름이다.
이 여름을 통해 자신에게 잠재하던 순수한 욕망을 마주한 것이기에,
채리티의 여름은 그 씁쓸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불멸(?)의 가치를 가진다.
바가지를 씌우려는 의사에게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도 하니가 선물한 브로치를 되찾는 그녀는
이 여름의 추억이 남은 삶을 지탱할 지주라고 믿는 것이다.
각설하고, 온갖 낭만 장면을 만들다 갑자기 먹튀해버린 하니를 보고 나니,
<오만과 편견>의 위컴이 다시 보인다.
위컴은 타고난 사기꾼에 불한당이지만, (적어도 소설 엔딩 시점까지는) 리디아와 결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건 물론 1800년대 초 영국 (배블런 식의) '유한계급' 사회라는 배경을 감안해야 한다.
만약 위컴이 하니처럼 먹튀의 길을 택했다면, 감옥 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베넷 부인은 베넷 씨가 위컴과 결투해서 죽을 걱정을 한다.)
위컴의 악행이 다아시라는 사람의 정신적, 물질적 풍요에 의해 구제될 수 있는 반면,
하니의 악행은 누군가의 자비심이나 선행으로 구제될 수 없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로열 씨의 행동이 선행이 아님은 물론이다. 버나드 말라무드의 <조수>에서 성폭행 당할 주인집 딸을 구한 뒤 자기가 성폭행하는 주인공이 떠오른다.)
이는 사건이 계급 내에서 벌어졌는가, 그 바깥에서 벌어졌는가의 차이 때문이다.
위컴은 가난하지만 적어도 노동자 계급은 아니며, 계략의 성공으로 결국 평생 유한계급으로 살아갈 것이다.
위컴보다 (리디아를 포함한) 베넷 씨 집안이, 그보다 다아시 집안이 훨씬 더 부유하지만,
결국 같은 계급 내에서의 차이다.
반면, 채리티와 하니는 전혀 다른 계급의 사람이다.
하니는 도시에서 잠깐 놀러 온 사람으로, 결국 도시로 돌아간다.
산골 마을 사람인 채리티는 도시로 갈 수 없다.
"산 위" 장면에서 명백히 드러나듯, 그녀는 오히려 현재 사는 마을 환경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출신인 것이다.
위컴은 우연적 악당인 반면, 하니는 구조적 악당이다.
위컴과 같은 사람이 다시 나올 확률은 우연, 즉 개인적 차원의 변수인 반면,
1900년대 초 미국 사회에 하니와 같은 사람은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다.
<오만과 편견>을 읽고, 당연히 다아시와 리지에 관한 글을 쓰게 될 거라 생각했다.
우연히 <여름>을 읽는 바람에 두 악당을 비교하는 글을 썼다.
이래서 독서가 즐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