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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Oct 24. 2018

우리가 내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

시간은 왜 한쪽 방향으로만 흐를까?


시간이란 무엇일까. 시간을 제외한 다른 속성을 다룬 물리학 법칙들은 대칭적이다. 공이 오른쪽으로 굴러가든 왼쪽으로 굴러가든, 공의 움직임은 동일한 물리 법칙에 의해 설명된다. 하지만 시간은 다르다. 나는 어제를 기억하지만 내일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내일의 기억>이라는 영화 제목이 멋지게 들린다.)


시간의 화살

시간의 이런 유별난 특징은 영상을 통해 확실하게 느껴볼 수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굴러가는 공을 찍은 영상을 거꾸로 돌려도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유리창이 깨지는 장면을 녹화해서 거꾸로 돌린 영상은 누가 봐도 비현실적이다. 물리법칙이 공간축에 대해서는 대칭적이지만 시간축에 대해서는 대칭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간의 방향성, 즉 시간의 화살(arrow of time)이다.



이 조각들이 모여서 컵이 되는 현상을 목격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얼마나 어려우냐 하면, 우주가 몇 번쯤 소멸하고 다시 태어나면 한 번쯤 볼 수 있을 정도? © Pixabay



시간의 화살은 열역학 제2 법칙으로 쉽게 설명된다. 즉, 어떤 닫힌 계의 엔트로피는 감소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엔트로피란 결국 가능한 경우의 수를 말한다. 모든 것은 경우의 수가 적은 방식보다는 경우의 수가 많은 방식으로 배열될 가능성이 크다. 동어반복이지만, 확률이 큰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크다.

책을 구성하는 원자들이 질서 있게 정렬하여 책이 되는 경우의 수는 하나뿐이지만, 페이지가 엉망으로 배열된 책이 되는 경우의 수는 훨씬 더 많다. 게다가 그 원자들이 무질서하게 배열되어 종이와 잉크가 섞인 곤죽이 되는 경우의 수는 그보다도 훨씬 더 많고, 타버린 재와 연소 가스로 배열하는 경우의 수는 또 그보다 훨씬 더 많다. 따라서 책이 타서 재가 되는 사건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재와 연소 가스가 재배열하여 책이 되는 사건을 인류가 관측할 일은 없을 것이다.

태초에 엔트로피가 한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시간의 화살은 오늘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그러나 만약 태초에 그 방향이 반대 방향이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여전히 우리는 시간이 처음에 정한 그 방향을 미래라고 부를 것이다. 거울 속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왼손으로 보이는 그 손을 오른손이라 부르고 살아갈 것이 분명하듯 말이다.


아주 이상한 우리 우주의 초기 조건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왜 시간은 처음에 그렇게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로 시작했단 말인가. 태초의 시간이 '하필' 그렇게 낮은 엔트로피로 시작한 사건은, 마치 백만 개의 흰 공과 한 개의 검은 공이 섞여 있는 주머니에서 공을 하나 꺼냈는데 그것이 검은 공인 사건과 같이 확률이 극히 낮다.

우주가 우연적으로 발생했다면, 처음에 시작할 때부터 엔트로피가 대단히 높은 상태에서 시작했을 확률이 가장 높다. 모든 것이 균일하게 섞여 더 이상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우주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결론이다.

빅뱅을 지지하는 증거는 많다. 무엇보다 우주배경복사라는 아주 강력한 증거가 우주 도처에 깔려 있다. 그래서 빅뱅이 사실이라고 하면, 왜 그런 이상한 초기 조건이 주어졌는지에 대해 과학자들은 설명을 찾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소위 '인류 원리'다. 우주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인간이라는 생물이 진화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주의 기원을 알아내려고 애쓰는 존재도 없었을 것이다. 엔트로피가 높은 '균일한' 우주는 물론이고, 빅뱅에서 출발하되 인플레이션을 거치지 않은 우주라도 오늘날의 우주가 될 가능성은 없다. 우주배경복사에서 관측되는, 초기 우주의 미세한 불균일성이 없었다면 은하도 태양도 지구도 없었을 것이다.

시간의 초기 조건에 대해 질문하던 과학자들은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묻기 시작했다. 그것이 우리 우주의 시간이든 아니든, 빅뱅 이전에 대해 알게 되면, 그것에 기인한 우리 우주의 기이한 초기 조건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애덤 프랑크가 쓴 <시간 연대기>에 소개된 몇몇 학자들의 이론을 살펴보자.


태초 이전의 시간

첫 번째는 호킹의 무경계 이론이다. 이 책에서는 아주 가볍게 언급만 하고 지나가지만, 주장한 사람 때문에라도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이다. 호킹에 따르면 시공간이란 처음과 끝이 있는 끈 같은 것이 아니고, 구체와 같이 '한계는 있으나 경계는 없는' 것이다. 지구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지구 표면은 분명히 유한한 공간이지만, 경계라는 것은 없다. 시작도 끝도 없다. 빅뱅 이전의 시공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호킹은 이렇게 설명한다. "남극보다 더 남쪽인 지점은 지구표면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본에 '남극보다 더 남쪽'은 없다. 특이점이 없는 우주의 시작이라면, '태초 이전의 시간'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호킹은 주장한다. © Pixabay



양자우주론 연구의 개척자였던 호킹은 '무경계' 우주론을 제안했는데, 여기서는 시간의 기원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444쪽)

태초 이전의 시간이란 것은 사실 모순적인 개념이다. 그것이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존재하지 않는 것'의 정의가 원래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호킹의 설명은 가장 단순하고 깔끔하다. 그러나 뭔가 서운한 뒷맛이 남는다.

두 번째는 오브럿(Ovrut)의 다중 우주다. 오브럿은 초끈이론의 최신판인 M-이론의 기본개념인 브레인(brane)으로 우주를 설명한다. membrane에서 기원한 용어인 브레인은 '막'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2차원을 넘어가면 막이라고 보기도 어려우니 그냥 '브레인'이라고 번역한 책들이 많다. 점이 0차원, 끈(선)이 1차원이라면, 막은 2차원 이상의 것들을 통칭한다. 2차원이라면 2-브레인, 3차원이라면 3-브레인이라 부른다. M-이론은 11차원을, 더 최신 이론은 12차원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3-브레인이다.

오브럿의 다중 우주는 거대한 n차원 공간인 '벌크'에 여러 n-브레인이 나란히 병치된 모습이다. 신문 여러 장이 다양한 간격으로 늘어져 있고, 그중 하나가 우리 우주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존재하는 네 개의 기본 힘들 중에, 중력만이 브레인에 묶이지 않는다. 중력은 브레인 외부, 즉 '벌크'로 유출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다른 힘들에 비해 유달리 약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우리 우주 외에 여러 우주가 존재한다면, 우리 우주가 기묘한 초기 조건으로 시작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우주가 수십억 개쯤 되면, 그중 한둘은 유달리 특이한 조건으로 시작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스타인하트와 투록은 오브럿의 아이디어를 확장해서, 빅뱅 자체가 두 브레인 간의 충돌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재미있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벌크 내에 존재하는 두 개의 브레인 월드를 표시한 그림. 초끈이론에 의하면, 중력자는 폐곡선인 끈의 형태인데, 다른 막에 영향을 줄 수 있다. © 애덤 프랭크



세 번째는 캐럴(Carroll)의 다중 우주다. 현재의 우주물리학에서 우리 우주 초기의 인플레이션은 '인플라톤'이라는 물질에 의한 것으로 가상하고 있다. 인플라톤은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사라지고 흩어졌지만, 일부는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게 남아있는 인플라톤에 의해 국소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빛의 속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팽창한 국소 우주는 원래 우주의 다른 부분과는 어떤 방식으로도 정보 교환이 불가능한 별개의 우주가 된다. 캐럴의 생각은 우리 우주도, 대개의 다른 우주도 이렇게 발생한 하나의 국소 우주라는 것이다.

거울 속 세상에서는 왼손잡이가 다수이고 오른손잡이가 소수일 것이듯이, 어떤 우주에서 시간의 방향이 우리 우주와 반대로 흐르기 시작했다면, 그 우주에서 시간의 화살은 우리와는 정반대라고 하더라도 그 우주의 입장에서는 정상이다. 그런데 캐럴의 다중 우주에는 수많은 '새끼 우주'가 존재한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합쳐 보면, 시간의 화살이란 것은 없다. 전체적으로 합쳐보면 중립이란 말이다. 우리 세상과 거울 속 세상을 합치면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가 동수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장 큰 범위에서 볼 때, 전체 우주는 새끼 우주들이 거품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모습이고, 새끼 우주들의 시간은 다중 우주의 시간에 대해 완전한 대칭을 이룬다. 다중우주를 전체적으로 보면 시간의 방향이 없다. (424쪽)



캐럴의 다중우주. 우주 전체적으로 볼 때 시간의 화살이란 특징이 제거된다. © 애덤 프랭크




네 번째는 바버(Barbour)의 '지금' 이론이다. 그는 과격하게도 과거니, 미래니 하는 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것은 지금뿐이다.

"'지난주'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우리의 기억뿐입니다. 그런데 기억은 지금 뇌 속에 있는 뉴런들의 안정적인 구조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구에 과거가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는 암석들과 화석들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현재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광물들이 배열된 안정적인 구조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기록이고 그 기록들은 바로 '지금'에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440쪽)

바버에 따르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배위 공간(Platonia)'이다. 이 공간에는 수많은 '지금'이 병렬적으로 존재할 뿐이며, 서로 아무런 관계도 가지지 않는다. 우리가 각각의 순간을 연속체로 파악하고 시간이라는 흐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플라토니아'라는 이름이 재미있지 않은가? 바버의 생각이 사실이라면,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것이 정말 존재할 것이다. 수많은 '지금' 중 하나는 충분히 이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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