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케이트 레이워스, <도넛 경제학>
그림은 설득력이 있다는 저자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도넛 경제학>이란 제목은 영 와닿지 않는다. 저자의 농담대로, 설탕과 지방 덩어리인 도넛을 좋은 것에 비유한 무모함이 느껴질 뿐. 더 좋은 명칭으로는 귀여운 곰 세 마리가 떠오르는 <골디락스 경제학>이 어떨까? 알다시피, 골디락스란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상태를 말한다. 아기곰이 먹으려고 떠 놓은 죽이 딱 먹기 좋은 온도 아니었던가.
경제도 마찬가지다. 주구장창 5%대 성장을 하는 경제가 좋은 게 아니라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 경제가 과열되면 인플레이션 우려가 있으니 금리 인상을 통해 경제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경제활동이 어느 선을 넘어서면 인류의 보금자리가 파괴되기 시작한다. 올 여름 전 세계를 달구었던 불가마 더위, 그리고 이제는 일상사가 된 미세먼지만 생각해도 무슨 얘기인지 알 것이다. 우리가 넘어서지 말아야 할 도넛의 가장자리는 환경재앙의 경계선이다. 이를 저자는 생태적 한계라 부른다.
도넛의 안쪽이 의미하는 것은 저성장이라기보다는 불평등이다. 저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사회적 기초' 정도는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물과 식량은 물론 교육과 일자리에의 접근권을 포괄한다. 성 평등도 대단히 중요하다. 여성이 자기 집안일을 하는 것은 GDP에 포함되지 않지만, 그녀가 남의 집안일을 해주게 되면 그것은 GDP에 포함된다. 여성의 무보수 노동은 경제적 불평등의 기저를 이루는 중요한 문제다.
불평등의 문제는 성 차별에서 그치지 않는다. 경제학을 바로잡겠다고 일어선 행동경제학 실험은 십중팔구 이상한(WEIRD) 표본을 대상으로 행해진다. 서구의(Western) 교육받은(Educated), 산업화되고(Industrial) 부유하며(Rich) 민주적인(Democratic) 사회의 구성원만이 인간 행동의 규칙성을 찾기 위한 실험의 표본이 된다. 세계 인구의 10~15%에 불과한 이들이 왜 인류를 대표하는가?
골디락스는 사실 중용과 다르지 않다. 탄소기반 생명이 진화함직한 행성은 골디락스 영역에 존재해야 한다. 그것은 주어진 조건이다. 반면, 이 책 저자가 주장하는 경제활동의 조절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정책이다. 따라서 골디락스보다는 중용에 어울린다. <중용 경제학>이라 명명하지 못한 것은, 다방면에 박식한 저자 케이트 레이워스가 미처 제자백가까지는 섭렵하지 못한 까닭일까.
쿠즈네츠 곡선
경제학자 쿠즈네츠는 경제성장에 따라 불평등이 증가하다가 어느 단계를 넘어가면 다시 감소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아래와 같은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이것이 쿠즈네츠 곡선이다.
GDP 성장이라는 성과지표를 떠받드는 경제학자들이 이 발견으로 무엇을 했을까? 그렇다. 경제성장이 모든것의 해답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이 증가하는 이유는, 아직 우리 경제가 쿠즈네츠 곡선 꼭대기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경제성장에 채찍질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불평등이 줄어들 것이므로, 경제성장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된다.
이 곡선이 마치 법칙이라도 되는 듯이 너도 나도 인용해대자, 쿠즈네츠는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이 곡선은 서구 일부 국가에서 발견된 현상일 뿐이고, 통계에 포함된 시기도 매우 협소하므로, 일반화하기 어렵다고 말이다. 그러나 통계로 거짓말을 할 때 누구나 그러듯, 경제학자들은 주석을 빼고 곡선만 여기저기 퍼날랐다. 성장이냐 분배냐를 토론하는 곳에 가면, 이야기가 쿠즈네츠 곡선에서 시작하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1990년대 초, 미국 경제학자 진 그로스먼과 앨런 크루거는 굉장한 규칙성을 발견했다. 약 40개국의 GDP 추이와 각국 내 지역의 공기 오염, 수질 오염 데이터를 나란히 놓고 연구하던 중에, GDP가 증가하면서 처음에는 오염도 증가하더니 그 다음에는 감소해 그림처럼 거꾸로 뒤집힌 U자의 모양을 그리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242쪽)
이것이 이른바 '환경 쿠즈네츠 곡선'이다. 경제성장이 분배 불평등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까지 개선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에 대한 해설도 같다. 경제성장으로 인해 사회가 어느 수준에 이르면, 불평등과 마찬가지로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케이트 레이워스가 주장하는 도넛의 안쪽 문제와 바깥쪽 문제 모두가 경제성장에 의해 해결된다는 것이 주류 경제학계의 입장이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불평등과 환경 파괴를 넘어서
쿠즈네츠 곡선이 사실과 다르다는 사실은 쿠즈네츠 본인도 인정했지만, 더 체계적인 반박은 토마 피케티에게서 나왔다. 그의 책, <21세기 자본>과 <세계 불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 불평등은 현재 추세가 역전되지 않을 경우 곧 사상최고에 이를 전망이다.
2015년 현재 전 세계 부자의 상위 1%는 나머지 99%의 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이 가졌다. (13쪽)
환경 문제 또한 다르지 않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교토의정서는 실패했다. 독일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감축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보다 훨씬 완화된 파리 협약이 비준되었지만, 2017년 6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이 탈퇴했다. 파리 협약이 지켜진다고 하더라도 지구 온난화는 당분간 멈추지 않는다. 그동안 쌓아 놓은 온실 가스가 앞으로 수십년 동안은 지구를 덥히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불평등과 환경 문제에 대해 경제학자들, 더 나아가 우리 세대 전부가 외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래 세대가 어떻게 되든, 별 체감이 되지 않는다. 케인즈도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장실패와 승자독식의 경제 환경의 기저에는 금융구조가 있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은 성공적인 양적 완화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최악의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방어했다고 자축했다. 과연 그럴까? GDP 성장률이 나쁘지 않게 나왔을 뿐, 금융위기의 여파는 많은 사람들을 극단적인 절망으로 몰아 넣었다. 중앙은행이 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양적 완화는 가진자들의 배를 불렸을 뿐이다. 그렇게 1%가 더 많이 가져가면, 평균값으로 구해지는 1인당 GDP는 올라간다. 중위소득이 떨어지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빈곤선 이하로 곤두박질치더라도.
그렇다면 불평등과 환경재앙의 파괴적인 미래를 피할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 해답이 도넛 경제학이라고 생각한다. 경제학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중용을 지키는 것이다. 액셀레이터만 밟는 지금의 경제학과는 달리, 브레이크도 적절히 함께 활용하는 것이다.
만약 경기침체가 예상된다면, 양적 완화를 하면 된다. 단, 지금까지와의 양적 완화와는 달리, 직접적인 양적 완화다. 은행이 신용 창출을 해서 통화량을 늘릴 것이라 기대하면서 은행에 돈을 줄 것이 아니라, 직접 국민들에게 돈을 주면 된다. 국민들은 그 돈으로 빛도 갚고, 소비도 늘릴 것이다. 중앙은행에 채권을 판 1%가 아니라, 100%의 사회 구성원에게 쓸 돈을 줘라. 이것이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People's QE)'다.
<대탈주>에서 앵거스 디튼이 지적하듯, 개발 원조는 피지원국 국민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악을 끼치는 것이 보통이다. <도넛 경제학>은 피지원국 국민들에게 직접 원조금을 송금하라고 제언한다. 이왕 직접 송금할 거라면 블록 체인을 활용하면 더 좋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존, 공유, 그리고 민주화가 인류의 미래라면, 현재의 GDP 경제학보다는 도넛 경제학이 더 어울린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기술 혁신이라는 신무기까지 주어져 있다. 도넛 경제학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하는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