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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의, 야경을 위한, 야경에 의한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산책

by 히말


반 고흐 미술관이 <까마귀와 밀밭> 등 너댓 개의 그림에 기대어 사람들을 끌어모은다면, 국립미술관은 <야경> 딱 한 개의 그림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그 정도로 <야경>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크다. 두 번째로 유명한 그림이라면 페르메이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Milkmaid)>일텐데, 안타깝게도 2019년 2월까지 도쿄에 대여 중이라 한다.



800px-Johannes_Vermeer_-_Het_melkmeisje_-_Google_Art_Project.jpg?type=w773 <우유 따르는 여인>


일단 입장하고 나면 렘브란트의 유명한 그림 몇 개가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동요되지 말고 큰 걸음으로 <야경>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현명하다. 시간이 좀 흐르면 그 그림 정면에서 보는 기회를 아마 잡지 못할 것이다.


<야경>은 원래 어두운 그림이 아닌데 보존제를 잘못 쓰는 바람에 어둡게 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록으로 봐도, 원체 어두워서 뭐가 뭔지 잘 안 보이는 부분이 많은 그림이다. 그런데 실물은 다르다. 상당히 밝아서, 별 어려움 없이 그림 구석구석을 잘 살펴볼 수 있다. 반닝코크와 그의 부관, 그리고 렘브란트의 부인인 사스키아가 모델일 것으로 추정되는 닭잡는 소녀 외에도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아주 잘 보인다.



1024px-The_Nightwatch_by_Rembrandt.jpg?type=w773 <야경>


<야경>의 실물에 대한 또 하나의 감상은 정말 거대하다는 것이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와 같이 큰 그림에 깊은 인상을 받아 왔지만, 이건 정말 크다. 게다가 일부가 잘린 것이라니 원래는 가로가 50센티미터는 더 컸을 것이다. 그렇게 큰 그림 한 가운데 위풍당당 빛을 발하며 서 있는 반닝코크 대위. 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 같으면 복제화를 열두 장은 더 주문했을 것 같다.


그림 바로 오른쪽에는 이 그림의 원본을 모사한 18세기 그림이 진열되어 있다. 반닝코크가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못 그린 그림이지만, 원래 그림에서 어떤 부분이 잘려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증거다.


1280px-Nachtwacht-kopie-van-voor-1712.jpg?type=w773 <야경> 모사화. 원작에서 잘려나간 부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야경>이 있는 방의 이름은 그냥 <야경>이다. <야경>의 양쪽으로는 마찬가지로 무식하게 큰 집단 초상화 두 점이 걸려 있다. <야경>이 얼마나 파격적인 구도의 집단초상화였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다. 양쪽의 집단초상화에는 인물들의 비중이 대개 비슷하다. 인물별로 명암의 차이는 거의 없고, 자세만 조금 다를 뿐이다.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화가들은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일반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야 했고, 그래서 등장한 것이 집단초상화다. 네덜란드 국립미술관이라 그런지, 집단 초상화가 정말 많다. 대개 크기도 크다. 스페인과의 독립 전쟁에 승리하고 잔치를 벌이는 석궁병 조합원들의 그림이나, 시 의회 멤버들 그림 같은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국립미술관에서 렘브란트를 빼면 페르메이르가 남는다. 페르메이르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는 헤이그에 있는 다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여기에는 <우유 따르는 여인>, <편지 읽는 여인>, <연애 편지>, 그리고 <델프트의 집>이 전시되어 있다.


<우유 따르는 여인>과 <편지 읽는 여인>은 빛의 미묘한 처리로 유명하다. 렘브란트처럼 현란하고 화려한 빛의 처리가 아니라, 아주 조용하고 얌전하고 은은한 빛이다. 이들 그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상징이 있다는 해석이 많은데, 나는 그다지 공감하지는 않는다.


517px-Vermeer,_Johannes_-_The_Loveletter.jpg?type=w773 <연애 편지>



<연애 편지>는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두 여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단히 극적인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라서 보는 재미가 있다. 서 있는 여인이 앉은 여인의 약점을 잡은 듯하다. 물론 그건 연애 편지일 것이다. 어쩌다가 들킨 건지는 몰라도, 그들은 또한 열린 문을 통해 관람자들에게 그 비밀을 들키고 있다.



484px-Johannes_Vermeer_-_Gezicht_op_huizen_in_Delft,_bekend_als_%27Het_straatj.jpg?type=w773 <델프트의 집> 또는 <작은 거리>


<델프트의 집>은 페르메이르에게는 희귀한 풍경화다. <연애 편지>에 나타난 열린 문이라든가, 반반 개폐된 공간이 보이는 점이 돋보인다. 솔직히 풍경화치고는 꽤 평면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벽돌을 보수한 흔적 같은 것도 치밀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국립미술관에서 렘브란트와 페르메이르를 보고 나면, 사실 볼 것이 없다. 고야 그림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면, 본 적도 없고, 고야 특유의 느낌도 전혀 없는 이상한 그림이 있는 식이다. 국립미술관의 50%는 야경, 30%는 페르메이르, 그리고 남는 20%는 여타 렘브란트 그림이라는 느낌이다. 다른 화가들의 지분을 다 합쳐도 1%가 안 되는 느낌이다.


국립미술관은 특이하게도 재입장이 가능하다. 그래서 두 시간 정도 관람하고 나와서 식사를 했는데, 다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야경> 하나만으로도 이 미술관은 방문할 가치가 충분하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 이상의 박력이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상의 감흥, 그리고 피터 브뤼헬의 그림들 못지 않게 세부 묘사를 보는 재미가 있다.


IMG_20181219_093954.jpg?type=w773 렘브란트 광장에 있는 야경 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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