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을 들르려고 계획하다 보면 언제나 같은 문제에 봉착한다. 아주 엄청난 과대망상에 빠져서, 기대에 가득차서 도착해 보고는 실망하는 패턴이다.
처음으로 가본 대형 미술관이 런던 내셔널 갤러리였던 것이 크다. 그 이후에는 루브르를 봐도 별 감흥이 없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정도를 제외하면, 내셔널 갤러리에 명함이나 내밀 수준이나 되는 미술관도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암스테르담에 들르게 되었으니 반 고흐 미술관과 국립미술관(Rijksmuseum)이 목표인 것은 당연. 검색을 좀 해보니, 반 고흐 미술관에 대해 이런 쓰레드를 발견했다.
질문: 반 고흐 별로 관심 없는데, 반 고흐 미술관 가볼 만 한가요?
대답: 반 고흐 미술관을 다녀오면 반 고흐 팬이 되어 나오실 겁니다.
절묘한 질문에, 정말 명대답 아닌가. 저 쓰레드 때문에 반 고흐 박물관에 대한 기대가 아주 훨훨 타올랐다. 여기저기 많이 팔려나가긴 했어도, 반 고흐 박물관에는 그의 대표작이 많이 있지 않은가. <까마귀와 밀밭>,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해바라기>, 그리고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있다. <유럽 모과, 레몬, 배, 그리고 포도>는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이다.
숙소에서 반 고흐 미술관을 가려고 5번 트램을 타니, 이 트램은 반 고흐 미술관이 컨셉이다. 그런데 트램에 장식된 그림 중에 <유럽 모과>가 있다! 나름 유명한 모양.
반 고흐 미술관은 사진 촬영 금지다. 게다가 조명도 아주 어둡게 해놨다. 일전에, 문화재 보호도 좋지만 관람권도 보장해야 하지 않겠냐는 글을 본 것이 생각난다. 어떤 영국인 학자가 빛에 의한 문화재의 손상에 관한 책을 낸 이후, 박물관의 조명 기준이 획일화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아홉 시 개장에 맞추어 갔는데도 이미 줄지어 있는 사람이 50명은 돼 보인다. 일단 어찌어찌 입장을 하고, 0층에서 고흐 자화상들을 보다가 퍼뜩 생각이 났다. 당장 3층으로 가야지. 시장바닥 같던 0층과는 달리, 3층엔 아직 사람이 적다. <까마귀와 밀밭>에 가서 약 5분 동안 거의 혼자 독대의 시간을 가졌다. 까마귀를 그린 검은 색 붓터치를 하나 하나 살펴보면서, 이 단순한 그림이 왜 심금을 울리는지, 생각해 보았다.
다음에는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이다. 이번 달 반 고흐 박물관 입장권 표지 그림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반 고흐 자화상 중에 가장 좋아하는 두 개 중 하나다. 역시 한 3분 정도 독대.
<유럽 모과>는 찾기가 힘들었다. 액자가 보존 가치가 있는지, 액자 채로 유리 박스에 들어 있었다. 마치 <모나리자>처럼. 다른 그림들도 마찬가지지만, 도록으로 볼 때와는 정말 다르다. 거의 노란색만 쓴 것 같은 그림이었는데, 녹색, 푸른색, 갈색... 노란색을 보조하는 조연들의 활약이 멋지다.
반 고흐 미술관은 카페 가격대가 착하다. 그래서 커피 타임 한 번, 점심 한 번 해서 두 번 카페에서 쉬면서 무려 네 시간을 미술관에서 보낼 수 있었다. 커피만 빼면 음식맛도 좋다. 특히 토마토 수프. MSG라도 듬뿍 넣었는지 아주 감칠맛이 빼어나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입구쪽에 가까이 위치해서 그런지, 나중에 가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별로 좋아하는 그림도 아니라서 그냥 지나치듯이 봤다. <해바라기>도 그렇게 좋아하는 그림이 아니라서, 몇 송이인지만 세고 지나쳤다. 15송이다.
별관의 특별전은 고갱과 라발이었다. 고갱은 어느쪽이냐 하면 싫어하는 쪽이라서, 별로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지만, 이왕 들어간 것, 보고 나왔다. 별 거 없었다. 유명한 자화상, <레미제라블>이 있을 뿐.
다음날에 들른 국립미술관과 비교해 봐도 분명히 드러나는 반 고흐 미술관의 강점은 역시 전시 방법이다. 0층에 (덜 유명한) 자화상을 모아 놓은 것도 괜찮았지만, <고흐의 꿈>이라는 제목의 설치 미술이라든가, 고흐의 그림을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보조 전시물들이 좋았다.
반 고흐 미술관은 큐레이션 컨셉이 현대 미술관에 가깝다. 무식하게 말해서 그림 수가 적다는 이야기다. (테이트 모던이나 오르세 같은 예외가 있지만.) 그래서 그다지 피곤하지 않게 관람할 수 있다. 물론 그러려면 카페를 적당히 이용해야 한다.
개인적인 결론은, 한 번 방문할 만하다. 사실 암스테르담 체재 중 두 번에 걸쳐 방문할까 했는데, 한 번 다녀오고 나니 다시 갈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가게 되면, <까마귀와 밀밭> 그리고 <유럽 모과>를 오랫동안 독대하고 나올 듯. 물론 그러려면 개장하자 마자 도착해서, 두 그림으로 직행을 해야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