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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Feb 07. 2019

진보정당의 존재의의

[잡식성 책사냥꾼] 노회찬, <노회찬의 진심>

초록은 동색


책에 나오는, 구소련에 관한 유머다.


흐루시초프 서기장이 격려차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했다. 스스로가 이과 출신인 그는 과학자도 인문소양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 젊은 과학자에게 물었다.


"연구원 동무는 <안나 카레니나>를 누가 썼는지 알고 있겠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젊은 과학자는 사색이 되어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모릅니다."


아니,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진달래꽃>을 누가 썼는지 한국 사람이 모른다는 이야기다. 서기장은 당황하여 다시 물었다. 정말 모르냐고. 다시 질문을 받은 그 과학자는 한참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정말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쓰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충격을 받은 흐루시초프는 KGB 책임자를 호출해서 질책했다.


"<안나 카레니나>를 누가 썼냐고 묻는데 자기가 안 썼다고 대답하다니. 도대체 KGB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이런 답변이 나오나?"


KGB 책임자가 사색이 된 것은 물론이다. 며칠 후, 그는 밝은 얼굴로 흐루시초프 앞에 섰다.


"서기장 동무, 지난번 말씀하신 국방과학연구소 과학자를 만났습니다. 장시간 진지한 대화를 나눈 결과, 그 과학자는 자신이 <안나 카레니나>를 썼다는 사실을 자백했습니다."


이것은 필시 냉전 당시 소련을 조롱하기 위해서 서방 측에서 퍼뜨린 유머였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KGB가 어떤 조직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정말로 네가 안 썼단 말이지?" "그렇다니까 그러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권력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언제나 내부에서의 반란이었다. 미국이 9/11 이후 대테러법을 제정할 당시, 많은 양식 있는 사람들이 반대한 이유는 그 법의 총구가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노회찬 의원의 2004년 일기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주제 중 하나는 국가보안법 철폐 문제다.


열린우리당만 결심하면 국가보안법은 철폐될 수 있다. 한나라당 핑계를 댈 일이 아니다. 국가보안법 폐지 의사가 없으면서 폐지안을 상정하는 것. 이것이 문제다. (16쪽)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 철폐 안을 발의하였으나, 진심으로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민주노동당뿐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왜 여당이 그런 안을 발의했겠나? 국민의 눈치를 본 것이다. 국민이 국가보안법 철폐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4년 7월 18일 일기에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야합을 가리키며 초록이 동색이 되어가고 있다는 평이 나온다. 선거공영제와 완전 비례대표제에 대해 두 거대당이 똑같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더 큰 문제는 빈익빈 부익부를 향한 레이싱을 정부 여당이 견제하려고 하지 않는 데 있다. 이날의 일기에는 정부가 준비 중인 연기금법 개편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제2의 카드대란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날 감사원은 카드대란의 책임이 금융감독원 부원장에게 있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그러나 연기금을 쏟아부어 대기업을 부양하겠다는 정부 여당의 정책은 제2의 카드대란으로 가는 로드맵일 뿐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c) 사회평론


진보 정당의 존재 의의


2007년 2월 20일, 저자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쓸데없는 토론을 지양하고 국민의 의견을 경청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이다. 당시 정부는 미국과의 FTA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이것이 빈부격차 확대로 이어질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제정책에서 차별화는 불가능합니다." (205쪽)


경제정책에서 진보와 보수가 차별화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경계선이 경제에 대한 시각인 것은 상식이다. 대통령의 발언은 자신이 보수주의자라는 고백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진보와 보수가 차별화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차별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대통령의 저 발언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사실은 저자도 알 것이다. 저 말은, 진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나오는 '경제는 누가 살리나' 타령에 대한 대답에 불과하다. 진보든 보수든 정부는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말 정도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이 어디 그런가? 경제 정책에 감놔라 배놔라 하고 싶은 보수세력이 저 발언을 가만두겠냐는 말이다. 노회찬 의원은 저 발언의 진의를 알면서도 비판해야 하는 입장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보 정당의 존재 의의다.


노회찬 의원은 또한 대통령에게 묻는다. 정말로, 참여정부가 실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냐고. 빈부격차가 사상 최대로 진행되던 당시, 노회찬 의원이 느꼈을 참담함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선거제도, 정치 후원 문제, 그리고 국가보안법 폐지에 이르기까지, 당시 여야 거대 2당은 결국 언제나 의견이 일치했다. 진정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바라던 사람들에게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부부 싸움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빈부격차를 줄일 수 있는 정책이 존재하고, 그 정책을 밀어붙일 의석 수를 국민들이 쥐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당은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누군가는 '6411번 버스를 타는 사람들'을 대변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 버스에 타시는 분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 5시 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출근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각이기 때문에 매일 이 버스를 탑니다. 한 명이 어쩌다 결근을 하면 누가 어디서 안 탔는지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300~301쪽)


그렇다. 진보 정당이 '유연성'을 발휘해서는 곤란하다. 일제 시대, 모든 지식인들이 이광수와 같이 유연성을 발휘했다면 지금 우리의 역사는 어땠을까? 약산 김원봉과 같이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덜 부끄러운 것이다.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던 그는 후원금을 통한 깨끗한 정치를 촉구하며, 지지자들에게 외쳤다.


"역사는 딱 진보 정당 득표와 세액공제 후원만큼 앞서간다." (298쪽)


2008년 7월 15일, 저자는 <PD 수첩>이 '마지막 신문고' 역할을 해야 하는 현실을 개탄한다. 체불임금을 받기 위해서는 <PD 수첩>이 문제를 보도해야 한다는 노동자의 민원을 받은 것이다. 이들이 한갓 TV 프로그램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면 정치란 왜 존재하는가? 불통을 미덕으로 아는 정치권에, 저자는 수백 년 전 어떤 못된 임금의 사례를 들어 일갈한다.


인조실록 1642년 5월의 기록엔 상언을 막기 위해 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동하는 행행도 폐지했다고 말한다. 말도 못 하는 세상에서 백성들이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1607년 경기도와 황해도에서, 1626년 경상도 의성에서, 1653년 경상도 상주에서, 1671년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250~251쪽)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문제는 '대통령과 진보진영의 인식 차이가 아니라 대통령과 국민 간의 인식 차이'라고 썼던 저자다. 국민을 가르치려 들지 말고, 국민과 진정으로 소통하기를 바란다고 썼다. 무려 노무현 대통령에게, 국민과 제발 소통하라고 조언할 자격이 있는 사람, 얼마나 될까?


2005년 조승수 의원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가 확정되자, 민주노동당은 10석에서 9석으로 의석 수가 줄어들면서 원내 제3당에서 제4당으로 밀렸다. 그래도 '정신적 제3당은 여전히 민주노동당'이라면서 저자는 걱정하는 지지자들에게 위로를 보냈다. 그러나, 지금 정의당의 의석 수는 5석이다.


<심슨 가족>의 에피소드에 이런 게 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사실은 외계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지구를 망하게 하려는 외계인의 음모였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민주당 대통령 후보도 외계인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서 미국인들에게 말한다. 누구를 뽑더라도 너희들은 망했다고.


(c) F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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