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말 Apr 21. 2019

잠시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


1.




내가 정말 좋아하는 화가, 터너의 <테메레르의 최후>라는 그림이다. 오랫동안 국가를 위해 봉사했던 전함, 테메레르 호가 석양을 배경으로 해안가로 견인되고 있다. 퇴역식을 위해서다. 서울대 의대 정현채 교수는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라는 책의 마지막을 이 그림으로 장식하고 있다. 이토록 장엄하게 죽음을 묘사하는 방법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묘한 배치다.







터너, <The Fighting Temeraire>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고, 자신만의 해법을 찾은 한 개인으로서 정현채 교수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라는 책을 읽다 보면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은 아닐 것이다. 죽음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사실은 죽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는 '근사체험'이다.




수많은 시냅스의 전기적 상호작용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우리의 의식. 그 의식이 끊어질까 우리는 두렵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것뿐이다. 어느 순간, 이렇게 선명한 나의 실존이 허무하게 공허하기만 한 암흑에 묻혀버리고 만다는 생각은 너무나도 두렵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이 과연 영혼의 불멸을 믿는 방법뿐일까?




<죽음은 두렵지 않다>에서 다치바나 다카시는 근사체험이 뇌의 노이즈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모든 생물이 겪어야 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은 두렵지 않다> 역시 읽기 불편한 책이다. 영혼 불멸이 일견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견해이기는 해도, 그것이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어찌 한갓 인간이 주장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세상은 그저 내가 꾸는 꿈일 수도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든 누구든, 유아론을 정말 확정적으로 깨뜨려 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역사상 최고의 철학자일 것이다.




백우진은 <글쓰기 도구상자>에서 학이불사, 즉 배우되 생각하지 않는 자의 전형으로 다치바나 다카시를 꼽았다. 4층 건물을 온통 책으로 뒤덮은 다치바나의 물량 공세에 경외감을 가진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죽음은 두렵지 않다>는 실망스러운 책이었다. 책을 많이 읽으면 겸손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다치바나의 오만방자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가 아무리 책을 많이 읽었어도 세상에 존재하는 책의 0.1%도 읽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죽음에 대한 논의로서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책이라면 스티븐 케이브의 <불멸에 관하여>를 들고 싶다. 죽음에 대항하려고, 인간은 그동안 영생, 부활, 영혼 불멸, 그리고 유산을 통해 살아남기라는 네 가지 방법에 힘써왔지만, 어느 것도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결론은 무엇인가? 바로 현재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이론물리학자 줄리안 바버의 '지금' 이론에 따르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지금'이라는 수많은 배위공간(Platonia)뿐이다. 과거나 미래라는 것은 인간의 뇌가 수많은 배위공간을 연결 지어 생각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따라서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나의 의식 내지는 실존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생각 자체가 틀렸다. 이 관점에서 살펴보면 스티븐 케이브의 결론은 묘하게 과학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하다. 과학적인지는 몰라도, 이 결론은 우리에게 아무런 위안을 주지 못한다.




스티븐 케이브






스티븐 케이브는 TED 강의로 유명해졌다. 비록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강의에서 그는 영생, 부활, 영혼 불멸, 그리고 유산이라는 네 가지 도피처를 '편견'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편견이란 잘못된 신념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잘못된 믿음에 매달리게 만든 것이다. <불멸에 관하여>의 맺음말은 아름답다. 우리의 삶은 시작과 끝이 있는 책과 같은 것이지만, 그 안에는 온갖 경험을 위한 기회가 가득하다. 단지 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책의 내용은 부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일 당장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게 살되, 내일 죽지 않더라도 역시 후회하지 않도록 살라고 저자는 조언한다.




그러나 이 얼마나 말만 아름다운 조언인가. 내일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게 살라는 말은 잔소리처럼 들어왔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일 죽지 않더라도 후회하지 않도록 살라는 말은 조언조차 되지 못한다. 다들 이미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2.




아툴 가완디는 외과 의사의 입장에서 죽음을 다룬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Being Mortal)>를 썼다. 가족들에 둘러싸여 집에서 죽은 할아버지와는 달리, 장모는 병원에서 서서히 죽어갔다. 현대인의 절대다수가 병원에서 죽는다. 가완디는 화학요법에 실패하고 집중치료실(ICU)에서 죽어간 새러 모노폴리의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사랑하는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할 기회조차 앗아가는 현대 의료의 실패를 말한다. 의식도 없이 죽음을 향해 천천히 내리막길을 걷는 몇 개월이, 과연 단 하루라도 가족과 함께 하는 죽음보다 나은 것일까?






아툴 가완디




하이더 와라이치의 책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역시 같은 주제를, 역시 의사의 입장에서 다룬다. 와라이치는 가완디가 다룬 주제에 더하여, 간병인, 대리인, 그리고 의사들이 직면해야 하는 죽음에 관한 결정에 대해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예컨대, 대리인은 의료진에 비해서 공격적인 치료를 선택하는 확률이 여섯 배나 높다. 의료진 역시 법적 분쟁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환자보다 공격적인 치료를 선택하는 비율이 높음에도 말이다. 환자들의 압도적 다수가 공격적인 치료를 원하지 않는 현실과 너무나 대비된다. 정현채에 따르면 기관삽관을 통한 인공호흡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며, 대다수의 환자가 소생 이후에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한다. 또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의사의 95%가 자신이 위험에 빠졌을 때 인공호흡을 거부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하이더 와라이치






의사들은 환자의 죽음을 패배로 본다. 그 직업의 본질을 생각하면, 일견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본인이 환자일 때, 의사들은 죽음을 패배로 여기지 않는다. 삶의 길이보다 삶의 질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매일의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심폐소생술을 원한다고 적는 의사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이것은 하이더 와라이치는 물론 정현채도 지적하는 사실이다.




안락사 내지는 조력자살이 합법화될 경우, 배우지 못해서 또는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서 죽음을 택하는 취약계층이 많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조력자살이 합법화된 1997년 이후, 통계는 그 반대가 사실임을 보여준다. 조력자살을 택한 압도적 다수가 백인(97%), 보험가입자(98%), 집에서 사망(95%), 호스피스 이용 전적 있음(90%), 고졸 이상 학력(94%)이었다.




130명의 안락사를 도와 '죽음의 의사(Doctor Death)'라고 불린 잭 키보키언은 조력자살 시술에 얼마를 청구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제정신이오? 이런 일에 돈을 받다니!" (정현채, 281쪽)




정현채에 따르면, 키보키언 박사는 조력자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자신의 사비를 사용했다고 한다. 




말기 암 환자가 의식을 잃을 때까지 벤조다이아제핀이나 진정제를 투여하는 것은 합법이다. 와라이치에 따르면, 이것은 안락사와 별 차이가 없는 방법이다. 존엄사라는 표현이 함축하듯, 결국 죽음 앞에서도 존엄을 지키고 싶은 것은 인간 욕망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조력자살이 합법화되면 과연 자살이 증가할까? 정현채에 따르면 자살의 순간, 사람들은 대개 그 섣부른 결정을 후회한다고 한다. 플로리다대학 토머스 조이너 교수는 투신했다가 목숨을 건진 사람들을 조사했다. 한결같이 그들은 투신 후 수면에 떨어지기 전까지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고 한다.




정현채는 또한 2011년 10월 22일 <그것이 알고 싶다>, "당신은 죄인이 아닙니다. 자살 유가족의 눈물" 편을 이야기한다. 자살이란 것이 남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상처가 되는지를 말하려는 것이다.




정현채는 시각적 이미지를 형성한 적이 없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조차 임사체험에서 일반인과 같은 이미지를 본다고 이야기한다. 임사체험이 사실임을 납득시키려는 그의 논리가 약한 것은 사실이나, 그가 그런 논지를 펴는 이유가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인 것 역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정현채는 2017년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 매년 여러 차례 헌혈 하며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삶을 살아왔다. 와라이치 역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더 이타적이고 헌혈과 기부에 적극적이라고 말한다. 




정현채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자신의 아버지 사례를 들어 의사의 역할에 관해 이야기한다. 척수종양에 걸린 아버지의 연명치료 결정에 앞서, 그는 두 명의 신경외과의와 상의한다. 의사는 환자와의 관계 설정에 있어 세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보호자, 정보전달자, 또는 해설자가 되는 것이다. 보호자적 의사는 환자에게 최선인 선택을 자신이 결정하여 통보한다. 반면, 정보전달자적 의사는 모든 정보를 제시하면서 환자가 직접 선택을 하도록 한다. 해설자적 의사는 그 중간 정도의 입장에서, 환자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완디, 와라이치, 그리고 정현채의 책은 모두 해설자적 의사의 입장에서 쓴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사는 아니지만, 케이브의 책 역시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벽 앞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도우려는 책이다. 고마운 마음으로 이들의 책을 읽고, 죽음이라는 숙명 앞에 겸손하며, 하루하루 더 가치 있게 살아가는 자세를 배워야겠다.






참고 문헌


정현채,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이더 와라이치,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스티븐 케이브, <불멸에 관하여>


애덤 프랭크, <시간 연대기>


다치바나 다카시, <죽음은 두렵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을 읽다] 안톤 체호프, <베짱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