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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Nov 29. 2020

개발독재의 내로남불

[독서 메모] 러시아 혁명사 강의 / 박노자

스탈린의 '5개년 계획'으로 대변되는 적색 개발주의가 어떤 상황에서는 훌륭한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한 교훈은 아마도 그것일 것이다. 금기시되는 것은 대개 관련된 모든 것이 함께 금기시된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실용주의자에게 진리는 실용성에 의해 판별된다. 소련이 망한 후, 빨간색에 대한 두려움은 조소로 바뀌었다. 그러나 빨간색이 묻은 모든 것을 통째로 폐기할 필요가 있을까? 김일성과 박정희는 서로를 죽이고 싶어했던 숙적이었지만, 둘 다 스탈린식 독재 개발로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하 발췌, 요약.


*****


- 레닌이 망명생활 동안 여유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어머니가 유산으로 남긴 제정러시아 국채에서 나오는 이자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제정러시아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 집단의 수뇌를 먹여살린 것이다.


- 레닌이 생각했던 무장반란은 추상적인 대중 폭동이 아니라 당원들에게 내리는 매우 구체적인 지침이었다.


- 훗날 KGB가 되는 조직은 1917년 12월 20일 레닌 자신에 의해 '체카(Cheka)'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 트로츠키의 글은 가벼우면서도 깊다. 쉽게 읽히지만 많은 생각들이 녹아 있다. 레닌의 글은 재미없었지만 트로츠키의 글은 즐겁게 읽었다고 박노자는 회상한다.


- 레닌은 모범생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형의 죽음으로 인해 충격을 받고 혁명 사상에 눈떴는데, 트로츠키는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비판적 탐구로 혁명의 길에 들게 되었다.


- 1903년 러시아 사민당이 분열했을 때, 트로츠키는 멘셰비키에 가담했다. 볼셰비키가 레닌을 독재자로 하는 사조직이 될 것을 염려해서였다.


-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 당시, 트로츠키는 레닌보다도 거물이었다.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제정 러시아 정부가 서방 국가에게 빌린 외채를 노동자들이 갚을 의무가 없다는 급진적 성명을 통해, 트로츠키는 일약 국제적 스타가 되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 국채 값이 폭락하자, 러시아 정부는 트로츠키를 체포하고 소비에트를 강제 해산한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재판에서의 열변으로 주가를 한층 더 끌어올리게 된다.


- 혁명과 볼셰비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트로츠키와 같은 독립적이며 비제도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혁명이 끝나고 나서 가장 쓸모없어진 인물 또한 트로츠키였다. 혁명 성공과 내란 종식 이후 볼셰비키 지도부가 가장 먼저 작심한 것이 트로츠키를 당 요직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 트로츠키는 러시아 민병대가 독일 정규군에 완패하는 것을 보고 정규군 편성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제정 러시아 장교들이 재임용되고, 공산당 출신의 정치위원이 모든 명령서에 서명을 하는 이원적 조직이 출현한다.


- 1919년 내전 당시 백군이 제작한 포스터나, 1920년 폴란드 전쟁 당시 폴란드 정부가 제작한 포스터를 보면 트로츠키는 악마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트로츠키의 군사적 재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다.


- 트로츠키는 러시아와 같은 후진적 국가에서는 일국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진정한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혁명이 선진국으로 번져야 하며, 러시아가 그 나라의 원조를 받아 빠른 속도로 공업화 및 선진화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진적인 사회가 되어야 노동자들이 민주적 요구를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현실은 스탈린에 의한 공업화...)


- 추방당한 트로츠키는 모든 나라들이 껄끄럽게 생각했다. 결국 그를 받아준 노르웨이마저도 국내 정치 절대 불간섭 조건으로 그를 받아주었다.


- 노르웨이에 체류하면서 트로츠키가 계속해서 스탈린을 비판하자, 소련은 노르웨이산 생선 구매 중단을 통보한다. 노르웨이는 트로츠키를 가택연금했고, 곧 추방한다. 노르웨이에서 쫓겨난 트로츠키는 혁명 이후 진보적 분위기가 꽤 남아있던 멕시코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암살당한다.


- 트로츠키주의 정당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지 않는 것은 이들의 교조주의적 성격이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


- 영구혁명론은 한 나라 안에 갇힌 혁명이 결국 반동화될 수밖에 없으니 혁명이 세계로 퍼져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1930년대 파시즘의 대두를 보며, 트로츠키는 영구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 인류에게는 전체주의의 야만이 닥쳐올 것이라 예언했다.


- 트로츠키가 국가를 단순한 도구로 여긴 것은 그의 사상의 치명적인 문제점이다. 국가를 무산계급이 혁명 후 이용할 수 있는 도구로만 본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다. 총칼을 쥔 자는 총칼에 지배당하게 되어 있다. 아나키스트나 생디칼리스트들이 이 점을 경고했지만, 트로츠키는 무시했다.


- 트로츠키는 암살당하기 수개월 전, 스탈린의 핀란드 침략을 지지한다. 타락한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핀란드보다 진일보한 국가라고 생각해서였다. 또한 핀란드 무산계급의 급진화에 기여할 것이라 생각했다.


- 트로츠키는 자신이 증오하는 대상, 즉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분석에는 날카로웠지만, 자신이 지지하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분석에서는 다소 편향적이었다. 사실 모든 인간에게 이런 측면이 있기는 하겠지만.


-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트로츠키는 죽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당은 늘 올바르다." 자신을 죽이려고 공격한 당이 올바르다는 것이다! 헤겔에게 국가가 신의 의지를 실천하는 단위였다면, 트로츠키에게 당 역시 그런 존재였다. 트로츠키는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적 헤겔주의자였던 것이다.


- 스탈린식 발전에서 희생된 것은 농민들이었다. 1929년 농민 협동화 정책 실시 이후로 농산물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1934년에는 대량 아사 사태까지 벌어진다. 이때 우크라이나의 피해가 특히 심했다. 일부는 이를 우크라이나 민족 말살 정책이라 생각했다.


- 러시아는 농민에 비해 노동자 수가 적었지만, 절대 다수(54%)가 대규모 작업장에 있었다. 사회주의가 발흥하기 충분한 조건이었다.


- 볼셰비키는 공장 노동자와 지식인의 정당이었고, 많은 농민들은 소외되었다. 레닌은 처음부터 농민을 타자로 규정했다. 결국, 1920년대 이후 스탈린 체제가 교육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을 포섭했다.


- 스탈린 체제의 불만을 잠재운 1등 공신은 교육 보급이었다. 1930년대 후반, 연간 100만 명이 대학생이 되었다. 서구에서 195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 나타난 현상이다.


- 스탈린 체제는 분명 억압적이었지만, 제정러시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민 포섭에 뛰어났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 체제는 사회주의라기보다는 대민 포섭 능력이 뛰어나면서 고속 압축 성장을 지향하는 국가 단위의 비시장적 개발주의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 스탈린 체제에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고속 승진의 기회를 의미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흐루쇼프다.


- 페레스트로이카는 1980년대까지 소련을 지탱해온 고속 성장이 흔들리면서 벌어진 일이다. 박정희 쿠데타 직전 상황이 '군 인사 적체'로 설명되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 기본적인 성찰 없이 급진 정치에만 매몰되었던 이들은 환상이 깨지고 극우로 전향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우파에 그런 이들이 꽤 있다.


- 지금 북한이 받는 무역 제재를 남한이 받는다면 며칠도 못 버틸 거다.


- 북한 체제를 찬미하거나 무비판적으로 편들자는 게 아니라, 그런 체제가 가진 내구력의 뿌리를 확인할 필요도 있다는 거다. 최근 러시아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계획경제 지지율이 50%가 넘는다. 소비에트 정치 체제 지지도도 40~50%를 넘나든다. 이미 몰락한 체제에 대해 과반수 가까운 이들이 지지를 표한다면, 그걸 단순히 몰락한 체제로 볼 수는 없다. 그 체제의 무엇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 개발주의를 추진하려면 사회 어딘가의 잉여를 끌어 투입해야 한다. 제국주의는 식민지 잉여를 착취했다. 소련, 중국, 북한은 농업 부문의 잉여를 착취해서 공업에 쏟아부었다.


- 소련에서 평생직장은 당연한 것이었다. 박노자의 어머니도 종종 아이를 직장에 데려가 동료들에게 맡겨 놓고 자기 일을 보시고는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라 전체가 구글... ㅡ.ㅡ;;)


- 박노자의 고딩 시절, 페레스트로이카로 양심수들이 석방되었다. 인구 2억의 당시 소련에 양심수가 겨우 200명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소수민족 분리독립주의자들이었다.


- 소련 사회는 사적 소비가 억제된 대신, 문화적 소비는 풍족했다.


- 1920년대 초반, 소련은 동성결혼이 가능한 세계 유일의 국가였다. 그러나 스탈린이 동성애를 다시 범죄로 다스렸다.


- 소련 체제에서 권력은 세습되지 않았다. 퇴직과 동시에 권력은 다른 관료에게 이전되었다. 그래서 소련과 중국의 관료들은 점점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층을 부러워하게 되었다. 적색 개발주의 국가에서 관료들은 가장 먼저 계급적 자각을 하는 계층이다. 마치 한국에서 강남 사람드이 정확히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져 투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적색 개발주의의 경험에서 배울 점을 찾자. 비시장적 산업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사실로 일단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사회가 가능하다면, 민주적이고 인권이 보장되는 비시장적 사회의 건설도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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