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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an 05. 2021

유령소년

[책을 읽고]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마틴 피스토리우스


0. 유아론


뇌-컴퓨터 인터페이스에 관한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다. 전신이 마비되어 세상과 아무런 소통도 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사실은 살아 있음에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회복불가능한 장애 상태에 빠질 경우,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연명치료 의향서를 쓴 사람의 이야기도 책에 나왔다. 나중에 정말로 전신마비에 빠지게 된 그는 움직이지 못하는 신체에 갇힌 상태로 초조해한다. 막상 상황이 닥치게 되자 예전에 섵부르게 내렸던 결정을 후회하는 것이다.


'서랍 속에 넣어놓은 그 의향서를 누가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나는 아직도 유아론을 결정적으로 논파한 철학자를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유비추리에 따라, 나와 흡사하게 생긴 다른 사람들 역시 나처럼 느끼고 생각할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전신마비에 빠진 환자들의 사례들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1. 버나


여기 12살의 소년이 있다. 이름은 마틴. 어느날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며 학교에서 조퇴한 그는 그대로 서서히 식물인간이 된다. 움직이거나 말을 못하는 것은 물론, 나중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그렇게 의식도 없는 어둠의 세계로 가라앉는다.


나는 바다 밑바닥에서 기어 다니는 해양 생물이다. 이곳은 어둡다. 춥다. 위아래, 왼쪽, 오른쪽, 사방에 온통 어둠뿐이다. (24쪽)

그러던 그가 조금씩 깨어난다. 의식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양탄자의 무늬를 보기도 하고, 간병인의 말을 듣기도 하며, 얼굴 위로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기도 한다.


양탄자가 보인다. 검은색, 흰색, 갈색으로 짜인 양탄자다. 나는 눈의 초점을 맞추려 애쓰며 양탄자를 응시한다. 하지만 다시 어둠이 내린다. (25쪽)

조금씩 의식하는 시간이 길어지다가, 결국 그는 깨어난다. 몸을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못하지만 그는 그 안에 완전히 깨어있다. 가족들도 간병인들도 꼼짝 못하는 육체 안에 그의 의식이 깨어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단 한 사람, 버나를 제외하고.


버나가 한 말은 뭔가 달랐다. 다른 사람들처럼 혼잣말을 하거나, 불특정한 대상 혹은 빈 방에 대고 말을 한 게 아니었다.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햇빛 속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또래 친구에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십대 친구들끼리 흔히 나누는 일상 대화였다. (40쪽)

간병인들은 환자를 씻기고 돌아눕히면서 혼잣말을 한다. 그러나 버나만은 진심을 다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외할머니가 아프다는 이야기, 반려견 이야기, 그리고 데이트할 생각에 설레는 속마음까지도, 버나는 마치 친구에게 말하듯 그에게 이야기한다.


어느날 버나는 '스위치와 전자기기'를 이용해서 의사소통을 하는 마비환자들의 이야기를 TV에서 본다. 그리고 마틴이 깨어있다고 확신하는 그녀는 마틴을 의사에게 데려가려고 한다. 마틴의 가족조차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버나가 나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하자 누군가 버나에게 물었다. "너는 정말 그가 저 안에서 깨어 있다고 생각하니?" (42쪽)

가족들까지도 믿지 않는 상황에서, 버나는 해냈다. 가족을 설득해서 마틴을 의사에게 보이게 된 것이다. 마틴은 여전히 꼼짝도 못 할 수 있다. 가족들은 실망할 것이다. 전신이 마비된 상태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그가 깨어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을까? 의사를 만나기 직전, 버나는 말한다.


"최선을 다해, 마틴.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야. 난 널 믿어." 나는 버나를 바라본다. 그녀가 눈가에 맺힌 눈물이 은빛으로 반짝인다. 버나의 굳센 믿음에 나도 반드시 부응하고 싶다. (44쪽)


2. 엄마


마틴의 부모에게는 세 자녀가 있다. 엄마는 마틴을 돌보기 위해 방사선사로서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몇 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차도 없이 시체처럼 누워 있는 마틴은 가족에게 크나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마틴을 요양시설에 보내자는 엄마의 말에, 아빠는 반대한다. 아들을 곁에 두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자 엄마가 말한다. 다른 두 아이들은 어떻게 하려고?


마틴이 결코 잊지 못하는 한 장면이 있다. 아빠가 마틴의 방에서 나가버리자, 홀로 남은 엄마가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마틴은 엄마를 위로하고 싶었다. 가족이 불행해진 데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그때였다.


엄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103쪽)

그 순간, 온 세상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마틴은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마틴은 점차 엄마의 절망을 이해하게 된다. 마틴이 다니던 돌봄시설에 마크라는 아기가 다니기 시작했다. 중증 발달장애로 모든 것을 챙겨줘야 하는 아기였다. 어느날 마틴은 마크의 엄마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


"아침마다 잠에서 깨면 아무 기억도 안 나는 순간이 있어요. 마음이 너무 가볍고 자유롭죠. 그러다 현실이 다시 돌진해 오고 마크가 떠오르죠. 하루가 될지, 한 주가 될지, 마크가 얼마나 더 오래 살지가 궁금해져요. 하지만 나는 즉시 일어나서 마크에게 가지 않아요. 대신 좀 더 누운 채로,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바람에 날리는 커튼을 바라봐요. 매일 아침 내 아들의 침대로 가서 그애를 볼 용기를 짜낸답니다." (104쪽)

마틴의 엄마도, 마크의 엄마도 그저 두려운 것뿐이었다. 마틴은 어머니를 이해하고, 용서한다. 식물인간이 될 때 열두 살 아이에 불과했던 그였지만, 그저 누워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는 철이 든 것이다. 시련은 그를 그 누구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키워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엄마의 과오를 용서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요즘 엄마를 보면, (중략) 엄마가 스스로를 용서했는지가 궁금해진다. 그랬기를 바란다. (105쪽)

3. 마틴


바위처럼 누워 아무런 움직임조차 할 수 없었을 때, 마틴은 시간을 세고,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는 세상 바깥에 서 있는 관찰자였다. 그에게는 사람들의 진심이 보였다. 서로에게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든 미움과 질시가 그에게는 보였다.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그에게 그런 것들은 '그냥 보였다.'


마틴은 버나의 도움으로 결국 의사소통에 성공한다.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글자를 포인터로 가리켜서 조금씩 문장을 만들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는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파트타임이기는 하지만 두 곳에서 일자리를 얻기도 한다.


그렇게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 마틴은 조용한 관찰자로서 가졌던 통찰력을 잃게 된다.


나는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점점 더 당황한다. 유령 소년이었을 때에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서로를 무시하거나 의심하거나 헐뜯으면 알 수 있었고, 칭찬을 하거나 놀리거나 수줍어하는 것도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지금은 그때와는 사물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235쪽)


식물인간이 되면서 잃어버렸던 말을 다시 배우고, 전자기기를 이용해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어느새 직장을 얻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까지 하게 된 마틴. 그는 영국으로 유학 간 여동생과 화상통화를 하다가 운명의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마틴을 남자로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버나의 진심을 알고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 했던 마틴이, 드디어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이다.


전신마비 환자에게 비행이란 모험이다. 비행기가 흔들릴 때 누가 그를 붙잡아준단 말인가? 열 시간에 달하는 장거리 비행이라는 모험을 통해 영국에 당도한 마틴.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그런데 그녀와 함께 사는 몇 달 동안, 그는 자기가 알지 못하던 세상의 속도에 놀라 당황한다.


신발을 세 켤레나 가지고 무얼 하겠는가? (365쪽)

휠체어에 앉아 생활하는 마틴에게 신발은 한 켤레면 충분하다. 연인 조애나는 그에게 신발을 사주고 싶어한다. 그녀는 마틴이 직접 마음에 드는 신발을 골랐으면 한다. 그러나 선택이라는 압박은 마틴에게 너무나 힘겹다.


나는 조애나의 세계에서 길을 잃었다. 그녀의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선택을 해야 한다. (366쪽)

자신의 욕구를 전혀 내보일 수 없는 상태로 오랫동안 살아온 마틴. 그에게는 배고프다는 관념조차 없다. 배고플 때 음식을 요구할 수조차 없는 세월을 보냈다. 그는 해결할 수 없는 욕구를 마음속에서 차단하도록 훈련해 왔다. 특정 음식에 대한 갈망 따위는 존재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그런 그에게 조애나의 세계는 끝없는 선택을 강요하는 이상한 곳이었다. 관찰자로서 지내다가 우리 세상으로 걸어들어온 마틴. 그의 한마디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한 아주 진실한 하나의 관찰일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유령소년(Ghost Boy)'이다. 이 책의 구석구석이 모두 마음에 들지만, 역시 최고는 이 책의 마지막에 온다. 좀처럼 보기 힘든 해피엔딩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조애나를 본다. 그녀는 크리스털 장식들이 박힌 흰 드레스를 입고 얼굴에는 베일을 덮고 있다. 빨간 장미 부케를 손에 들고서 미소를 짓고 있다. 심장이 멎는 기분이다. 나는 오늘, 지난날을 되돌아보지 않겠다. 지금은 과거를 잊을 시간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미래뿐이다. 조애나가 여기 있다. 내게로 걸어오고 있다. (4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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