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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an 18. 2021

[책을 읽고]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

1.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철저히 파괴되었던 도시, 드레스덴. 그곳에 터키 출신 예술가가 설치 미술을 세웠다. 곧바로 벌어진 온라인 댓글 대전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설치 미술 자체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터키 출신인 그 사람을 모욕하는 글로 도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언제나 보는 일 아닌가? 주제를 벗어나서, 사람들은 대상을 어떤 '존재'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존재를 매도한다.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저의 행위다. 마음속에서 저지르는 살인이니까 말이다. 파울로 코엘료도 <내가 빛나는 순간>에 이렇게 썼다.


절대, 내 존재가 사과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파울로 코엘료, 29쪽)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이다. 부정하기 위해, 그들은 일단 대상의 본질을 규정한다. 그런데 그 규정이라는 행위부터가 문제다.


강신주의 명저, <철학 vs 철학>은 본질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본질이란 무엇인가? 곡학아세하기 좋아하는 (대학 시절 나 같은) 사람들은 이런 철학적 명제를 어렵게 몰고 가려고 기를 쓰지만, 사실 본질이란 별 것 아니다. 예컨대 책상의 본질은 책을 보기 위한 용도라고 할 수 있다. 본질을 가장 멋지게 정의한 철학자는 아마 플라톤일 것이다. 이데아가 바로 본질이다. 대학 시절 내가 한참 빠졌던 철학자 둘, 즉 노자와 하이데거 역시 본질에 관해 깊은 탐구를 진행했다.


이데아. 영원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연금술사가 금의 변환식을 찾듯이, 아니 '철학자의 돌'을 찾듯이, 철학자들은 진리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보니 스무살 비트겐슈타인이 건방지기 짝이 없는 책, <논리철학논고> 따위를 라틴어 제목으로 내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뭔가를 깨달은 연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멋지기 그지없다. 나는 예전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캐릭터 중에 카지를 좋아했는데, 그말을 듣고 친구가 내게 물었다.


"카지가 왜 좋아? 여자들한테 인기 있어서?"


그런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순간 뜨끔 했지만, 나는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이유를 말했다.


"모든 걸 다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잖아."


그러나 그의 결말은 어땠나? 석연찮은 의문사였다. 십중팔구, 킬러들에게 쫓기다가 자살했을 것이다.


각설하고, 철학자들이 찾아헤매는 진리가 무엇인지 풀어쓸 수 있다면, 그건 세상만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일 것이다. 본질이란 이렇게나 위력적이다. 그러나 강신주는 이렇게 접근한다. 예컨대 책상의 본질은 책을 올려놓고 보는 용도, 뭔가를 쓰기 위해 종이를 올려놓는 용도라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누군가가 책상에 삐딱하게 기대앉아 이야기를 시작한다. 본질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뭐하는 짓이야! 책상에 기대앉다니!"


책상에 기대앉는 사람은 책상의 본질을 해친 것이다. 본질을 중시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탈행위다. <합리적 보수>라는 책의 저자인 (이름을 기억할 가치도 없는) 뜨내기 교수는 보수를 이렇게 정의했다. 보수란, 우리에게 지켜나갈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는 생각이라고. 밑줄을 쳐야 할 부분이 어디일 것 같은가? 그렇다. 바로, '우리'다. 보수란 근본적으로 적과 나를 가르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저 책에 나오는 사례를 따라 설명하자면, 오래된 집들을 헐고 거기에 '장애인 체육시설'을 짓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게 'VIP 뱅킹 센터'였으면 저자가 반대를 했을까?)


보수의 원래 의미는 바로 '지키는 것'이다. 뜨내기 글쟁이가 '우리'라는 표현을 쓴 데 대해 격분한 나머지 이야기가 빗나갔다.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주인공 테브예는 언제나 외친다.


"전통(Tradition)!"


그렇다. 지켜야 할 것은 전통이란 말로 종종 포장된다. 왜 지켜야 하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한심하다. 전통이니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동어반복은 수학자가 사용할 경우에나 의미가 있는 법이다.


요약하면, 보수란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입장이고, 따라서 본질이라는 것, 세상만사에 변하지 않거나 변하면 안 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철학이 본질에 집착하면, 보수 정치 이데올로기로 흐르기 쉽다.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논했고 신생 폴리스에 '공산주의'를 도입하겠다고 했다지만, 아마 그것은 스탈린식 공산주의가 되었을 공산이 크다. 이데아라는 본질을 지켜나가는 체제였을 테니 말이다.



2.


반드시 보수에게서만 발견되는 특징은 아니지만, 본질에 집착할 경우에 발생하는 현상이 하나 있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는 것이다. 서두에서 말했던 드레스덴의 반전 기념물 사건이 바로 그런 경우다. 작가의 손가락은 기념 조형물을 가리켰지만, 사람들은 그 손가락이 터키인의 손가락이라는 것에만 주목했다. 책상에 기대앉은 상대와 대화하던 사람도 대화 내용은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책상에 기대앉은, 그래서 책상의 본질을 훼손한 상대방을 어떤 '존재'로 규정하고 그 존재가 왜 잘못되었는지에 집착했을 테니까.


트럼프 역시 달이 아니라 손가락에 집중했다. 대통령 후보인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 대신, 그 질문을 던진 기자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집중했다. 그래서 장애인 흉내를 내며 그를 모욕했다. 장애인들은 어차피 자신에게 표를 던지지 않을 테니, 장애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표를 집중시키겠다는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마 그는 그냥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사람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그저 하던 대로 행동한 것이다.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이라는 책의 주제는 간단하다. 그렇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트럼프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을 저자는 '품위'라고 규정하고, 심지어 '품위'라는 단어에 맞는 정의를 찾기 위해 꽤 노력을 들인다. (주객전도가 아닐 수 없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이 또한 달 대신 손가락을 보는 행위다.)


하지만 그가 던지는 질문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바로 그 질문이다. 우리가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변을 주지 않는다. 도덕적 당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자명하다. 나는 그 대답을 유명한 다음 싯귀로 대신하고 싶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가톨릭 신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개신교인이었으므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런데 이제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틴 니뮐러, <그들이 왔다>)


더 중요한 다음 질문, 즉 어떻게 하면 품위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관한 답은 뭘까? 저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서 그 답을 찾는다. 


그가 너에게 악행을 시도하려 할 때 조용한 말투로, "그러지 말게, 친구여. 우리는 뭔가 다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지 않은가. 자네가 나에게 악행을 저지른다면, 나는 해를 입지 않지만 자네는 그 행동으로 해를 당하게 될 걸세. 내 친구여!"라고 권한다면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너에게 무슨 해를 가할 수 있겠는가? (193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재인용. 밑줄 필자.)


다시 말하면, 남을 배려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결국 자신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배틀로얄>에서 미무라 신지의 삼촌은 눈앞에서 여자친구에게 퇴짜를 놓는 조카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반드시 상대방을 배려할 것. 그것이 규칙이다."


키리야마 카즈오에게 공격당해 죽어가면서, 신지는 삼촌의 말을 되새긴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신지는 이이지마라는 '친구'를 배려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카즈오에게 위치를 발각당해 선공을 빼앗긴 뒤였다.


심지어 원숭이 무리도 규칙을 지킨다. 인간 사회가 많은 규칙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보여도, 우리가 정말 지켜야 하는 규칙은 몇 되지 않는다. 십계명도 겨우 10개의 계율로 되어 있을 뿐이며, 유교의 오륜은 겨우 다섯 개뿐이다. 인간 사회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단 하나의 규칙을 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칸트의 황금률이나 공자의 '서' 개념 아닐까? 간단히 말해,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규칙이다.



3.


공상과학소설의 아버지 H. G. 웰즈는 <월드 브레인>이라는 책에서 오늘날의 인터넷과 비슷한 것을 고안했다고 한다. 1938년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웰즈는 역시 웰즈다. 문제는, 그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지금 우리 시대의 '정보의 바다'라는 것이 허위와 거짓의 바다가 되었다는 데 있다.


<월드 브레인>은 색다른 것이 아니다. 웰즈는 마이크로필름과 같이 쉽게 복사, 배포가 가능한 매체의 등장으로 (진실된) 정보가 널리 퍼질 것을 기대했다. 암호화폐의 분산원장이 위변조를 방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인터넷은 분산원장이 아니며, 쉽게 복사, 배포가 되는 대상은 진실뿐 아니라 거짓도 해당된다. 저자는 거짓 정보를 마구 뿌려대는 정치인의 대표적인 사례로 보리스 존슨, 도널드 트럼프, 그리고 블라디미르 푸틴을 든다. 그들의 태도는 이렇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거짓을 말할 때면 그는 아마 더 이상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도 없을 것이다. (167쪽)


묘하게도, 이런 태도는 짐 홀트가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에서 정의한 '헛소리(bullshit)'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의도된 거짓말보다 헛소리가 더 위험한 이유는, 진실 검증이라는 문제를 아예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반대보다 무관심이 더 무서운 것과 마찬가지로, 진실을 거부하는 것보다 진실여부를 아예 무시해버리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친구'는 대단히 작위적인 인물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휠덜린의 <히페리온>에 나오는 동명의 등장인물보다 훨씬 더 작위적이다. 그리스 희곡에 나오는 '코러스'가 더 사람 같아 보일 지경이다. 이들에 비하면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데미안은 살아 움직이는 인물 수준이다. 각설하고, 저자의 말에 무조건 맞장구만 치는 이 '친구'는 주점에서 특정 브랜드의 맥주를 거부한다. 그 맥주를 생산하는 기업의 비윤리적 행태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것을 바로잡으려면 개인 차원에서 노력하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투표를 해야 한다. 게다가 특정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아집에 빠지기 쉽고, 자신들과 다른 노선을 견지하는 사람들을 깔보기 쉽다. 채식주의든 미니멀리즘이든 소비자행동주의든 마찬가지다. 이런 생각들이 '본질'을 향한 또하나의 집착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자칭 '진보'라는 사람들 역시 위험할 수 있다. 예컨대 자신만의 신념으로 채식을 하는 데서 더 나아가 채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백안시한다면, 그건 인간 섭생의 본질은 '채식'이라 규정한 보수적, 아니 나치적 사상에 다름 아니다.


독일 어느 지방에 난민들을 태운 버스가 진입하자, 기다리고 있던 시위대가 버스를 막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시위대'가 한 말은 굳이 여기에 옮겨적을 필요가 없다. 예상범위의 것들이니까. 여기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사건을 접한 어떤 '진보주의자'의 논평이다.


이 동네에는 특히 노인과 어리석은 사람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죠. 그들은 스스로 나치가 되겠다고 이야기해요. (206쪽)


이 용감한 사람은 상기 인터뷰를 무려 '익명'으로 진행했다. 그는 '이 동네 사람'과 '노인'에 대해 고정된 '본질'을 부여해서 그걸 자신있게 피력한다. 이런 사람을 진보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진보라는 개념은 '변화에 대한 수용'을 포함한다. 전후좌우로 꽉 막힌 이 사람의 내부세계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이 사람은 그저 극우가 싫은 또다른 극우일 뿐이다. 바로 동족혐오라는 현상이다.



4.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호의적인 자세로 대하려 하거든." (248쪽)


이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이 어려운 시대를 '품위있게' 건너는 방법인 것이다. 사실 이것은 <이기적 유전자>에도 소개된 것처럼 로버트 액설로드의 시뮬레이션에 의해 진화생물학에서 최적 전략으로 제시되었던 전략이다. 첫 수에는 협력, 그 다음부터는 '받은대로 돌려주기(tit-for-tat)'를 취하는 전략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처음' 만난다는 것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보행신호 위로 뛰어드는 자동차,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밀고들어오는 사람들, 금연 표지 바로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나는 '만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어떤 호의를 베풀어야 할까? 어려운 문제다. 살면서 단 한 번밖에는 마주치지 않을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다.


이 책은 정치 양극화로 특징지어지는 지금 시대가 요청하는 책이다. 잘 쓴 책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폭넓은 조사와 생각이 깃든 책이다. 이 책이 불러온 많은 생각들의 연쇄는 나를 조금쯤 변화시키지 않았을까. 그렇게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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