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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an 20. 2021

2020년 최고의 만남,
페드로 도밍고스

2020 독서 결산 - 최고와 최악

2020 올해의 책


페드로 도밍고스의 <마스터 알고리즘>입니다.


10월 초에 혜성 같이 등장,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제치고 올해의 책 후보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개러스 사우스웰의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과학철학 지식 50>의 강력한 도전을 받았지만 방어전에 성공했습니다.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이 너무 두꺼워서 2021년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페드로 도밍고스는 올해의 책을 차지하게 됩니다. 사실 강신주의 책이 포함되었더라도, 페드로 도밍고스가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스터 알고리즘>과 '올해의 책' 자리를 놓고 겨루었던 훌륭한 책 아홉 권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와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해당 분야 최고전문가가 책도 참 잘 쓰네요. (TOE 상대진영의) 브라이언 그린보다 글솜씨나 전달력이 뛰어난 듯.


개러스 사우스웰의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과학철학 지식 50>

궁극의 유희, 철학. 간만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정말 믿고 봐도 될 듯.


Reuven Lerner의 <Python Workbook>

요점만 집어내는 명강의. 읽기 최적화하느라 중언부언하는 요즘 추세와는 조금 다른 간략한 코딩.


류츠신의 <삼체>

SF는 역시 중심 아이디어의 참신함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책.


헨리 마시의 <참 괜찮은 죽음>

에세이에 필요한 딱 적절한 수준의 감정선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 수작.


김태진의 <아트인문학>

말이 필요없는 미술 입문서.


마이클 모슬리의 <미친 듯이 20초>

운동할 때 드는 그 수많은 질문과 고민을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책.


칼 뉴포트의 <디지털 미니멀리즘>

본인이 성공적으로 걸어갔던 길을, 다른 사람들도 잘 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이끌어주는 책.



2020 분야별 결산


1. 자연과학/수학/공학


5점 만점을 받은 책은 모두 10권입니다. 카를로 로벨리의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페드로 도밍고스의 <마스터 알고리즘>, 개러스 사우스웰의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과학철학 지식 50>,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 강의>, 사라시나 이사오의 <폭발적 진화>, Eric Mathes의 <Python Crash Course>, Reuven Lerner의 <Python Workbook>, 벤 올린의 <이상한 수학책>, 데이비드 아이허의 <뉴 코스모스>가 그들입니다.


카를로 로벨리의 <모든 순간의 물리학>, 마크 미오도닉의 <사소한 것들의 과학>은 4점을 받았지만, 5점에 가까운 4점이었죠.


분야 특성상 평점 1점이 나오기 어려운 분야인데요, 김경철의 <인류의 미래를 바꿀 유전자 이야기>가 한 건 해냈습니다. 올해의 나무학살자 부문을 거의 석권할 뻔했는데, 막판에 더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그 영예는 아쉽게 놓쳤네요.


2. 사회과학


박노자의 <러시아 혁명사 강의>,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와 <후불제 민주주의>가 5점을 받았습니다. 김진한의 <헌법을 쓰는 시간>과 차병직 등 공저, <지금 다시, 헌법>도 반올림으로 5점을 받았습니다. 4점을 받은 책들 중에서도, 롤프 도벨리의 <뉴스 다이어트>와 마크 고울스톤의 <토킹 투 크레이지>는 언급할 만한 책들입니다. 1점짜리 불쏘시개는 없었습니다.


3. 경제/경영


얀 칩체이스의 <관찰의 힘>은 분명 괜찮은 책인데, 뭔가를 숨기는 느낌, '책 다 봤으면 강의 등록해라'라는 느낌이 강해서 3점(!)을 주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4점으로 정정하죠. 미히르 데사이의 <금융의 모험>, 마셜 앨스타인 등의 <플랫폼 레볼루션>, 그리고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일할 것인가>가 5점을 받았습니다. 1점 영웅은 없었습니다.


4. 픽션


류츠신의 <삼체>, 피터 스완슨의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민의 <선택의 아이>가 5점 만점의 주인공들입니다. 4점을 받았지만, 구병모의 <아가미>도 훌륭합니다. 역시 4점을 받은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류츠신의 <삼체2>도 좋습니다.


이 분야에서는 팀 보울러라는 사람의 <리버보이>라는 어이없는 소설이 1점을 받았지만, 정작 화제의 주인공이라면 위화를 꼽아야겠습니다. 저는 위화의 <인생>, <허삼관 매혈기>,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 5점을 주었고, 단편소설집도 4점을 줬습니다. 그런데 <형제>. 이건 정말 아닙니다. 위화의 인격을 의심하게 만드는 '상품'입니다. 아무리 인기작가라도 이런 걸 팔면 안 되죠. 아마 당분간 위화는 멀리하게 될 듯합니다. 겁나잖아요, 또 뭘 만날지.


5. 넌픽션/에세이/글쓰기


1점 짜리 나오기 딱 좋은 분야죠. 문화제국주의가 뚝뚝 묻어나는 헨미 요의 <먹는 인간>, 딱 학교 기말 리포트 수준인 변진경의 <청년 흙밥 보고서>, 책 제목과 전혀 다른 내용인 진민영의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어쭙잖은 법 상식 얘기를 왜 소설 형식으로 했는지 의도가 의심스러운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의 <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는가>, 조현병 환자들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기는커녕 만들어주는 책인 론 파워스의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그리고 대망의 2020년 나무학살자, 이낙원의 <우리는 영원하지 않아서>  등 1점 짜리가 무려 여섯 권이나 나왔습니다.


반면 5점 짜리도 쏟아졌습니다. 위대한 인간을 보여준 마틴 피스토리우스의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생과 사의 현장에서 어떻게 지혜가 쌓이는지를 보여준 헨리 마시의 <참 괜찮은 죽음>, 인생 선배님들의 귀한 이야기인 이근후의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과 우영종의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그리고 설명이 필요없는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 두 권이 5점을 받은 책들입니다.


같은 소재를 다뤘는데 평점이 판이하게 나뉜 분야도 바로 에세이들입니다. 똑같이 의사의 이야기지만 헨리 마시는 5점 만점의 걸작이었고, 이낙원의 책(?)은 정말 나무에 대한 죄악이죠. 같은 환자 수기였지만 마틴 피스토리우스는 5점, 론 파워스는 1점입니다. <청년 흙밥 보고서>는 정말 글쓰기의 기본도 안 된 책이지만 비슷한 소재를 다룬 <달빛 노동 찾기>는 4점을 받았습니다.


6. 예술


딱 한 권, 김태진의 <아트인문학>을 읽었고, 5점이었으며, 엄청난 걸작입니다.


7. 운동/건강


마이클 모슬리의 <미친 듯이 20초>, 이덕희의 <호메시스>, 스티븐 건드리의 <플랜트 패러독스>가 5점을 받았습니다. 잘 배우기는 했는데, 실천이 문제죠. ^^;;


8. 자기계발/실용/취미


넌픽션/에세이와 마찬가지로 1점 짜리 나오기 좋은 분야입니다. 개리 비숍의 <시작의 기술(Unf*ck Yourself)>가 1점을 받았습니다. 읽는 데 겨우 1시간밖에 안 걸렸지만 그 시간이 아깝네요. 그렇게 얇은 책에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같은 말 무한 반복이고, 글을 잘쓰는 것도 아니어서 동기부여가 하나도 안 됩니다. 이 작자가 욕하는 토니 로빈스는 글이라도 잘 쓰죠. 정말 가소로운 책이었습니다.


라이언 홀리데이의 베스트셀러 <스틸니스>, 사사키 후미오의 <나는 습관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이지영의 <심리계좌>가 4점을 받았으나 주목할 만한 책들입니다.


5점 짜리도 나왔습니다. 칼 뉴포트의 <디지털 미니멀리즘>. 남들에게 정말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은 어떻게 써야하는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사사키 후미오의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했다>의 디지털 버전이고, 마찬가지로 대단히 잘 썼습니다.



2020 나무학살자 어워드


매년 그 해 최고의 책을 꼽아왔지만, 올해부터는 최악의 책도 기록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고와 마찬가지로 최악 역시 제 경험의 일부이고, 개인적 역사의 한 쪽으로 남을 테니까요. 그래서 '나무학살자'라는 이름을 지어봤습니다. 이 말을 만들게 한 책은 김경철의 <인류의 미래를 바꿀 유전자 이야기>였습니다. 시류에 맞는 키워드 잡아서 책을 빨리 낼 생각이었는지, 출판사에서 제대로 체크도 하지 않은 책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내용이 챕터마다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이 얇은 책에서 '유전자'가 뭔지 정의하는 구절을 다섯 번은 본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책을 낼 때는 기존에 나와있는 책들을 검색해보고, 차별점을 부각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야 책이 팔릴 테니까요. 그런데 이 책엔 그런 과정이 없었나 봅니다. 기존에 읽었던 책에서 정말 1도 차별점이 없습니다. 그토록 얕은 깊이에, 기존의 유전체 의학 관련 서적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을 단 한 문장도 넣지 않았습니다. 반복암기를 위한 교재인가요? 저자의 문제도 있겠지만, 이 책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출판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2020년 나무학살자 어워드의 주인공은 아쉽게도 이 책이 아닙니다. 곧 더 막강한 상대를 만났거든요. 이낙원의 <우리는 영원하지 않아서>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정말 불쾌한 책이라서, 길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최소한의 코멘트는 해야겠죠.


부끄러운 일을 했다면, 반성하는 내용을 책으로 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게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고 자랑을 한다면?


맹자는 수오지심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죠.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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