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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an 21. 2021

[책을 읽고] 우주, 시간, 그 너머
/ C. 갈파르

브런치 제목 공간 제약은 정말 어이없군

내가 친애해 마지않는 과학자, 스티븐 호킹의 직속 제자라는 사람이 쓴 책이다. 전체적으로 책은 재미있다. 우주와 기본 물리학에 관한 이야기가 재미있지 않을 재간이 있단 말인가. 이 책의 문제는 그냥 책을 못 썼다는 데 있다.


우선, 드라마화가 지나치다. 쌍둥이의 역설을 말하려는 인트로로 무려 여섯 쪽에 걸쳐 소설을 쓴다. 이렇게 틈 날 때마다 소설을 써댄 결과, 이 책은 500쪽이 넘는다. 진화론에 관한 학습만화가 있다고 해보자. 주인공들이 이능력 배틀을 벌이는 내용이 주가 된다면 그게 과연 제대로 된 '학습만화'일까?


우주 여행을 한다고 상상해보라는 것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옆자리 승객이 어쨌다는 둥, 안내 로봇이 인사도 안하고 사라졌다는 둥 하는 이야기는 도대체 왜 하는 걸까? 재미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저런 썰렁한 조크만 모아도 100쪽은 족히 넘을 것 같다.


시간의 관한 논의도 부족하다. 시간의 화살이라든가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아예 빠져 있다. 시간에 관한 이 책의 논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빅뱅 이전의 시간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가상시간'이란 엄밀한 표현을 썼지만, 음수의 시간, 그러니까 '기원 전'과 같은 식으로 생각하면 빅뱅 이전의 시간은 쉽게 상상 가능하다. 문제는 그런 상상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다. 저자의 스승이기도 한 스티븐 호킹이 말한 대로, 시간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기 전이라는 이슈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북극점에서 서서 북쪽이 어디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호킹이 여러 차례 말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 책에는 장점도 많다. 예컨대 우주의 팽창은 빛의 속도보다도 빠른데,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형상화가 잘 되지 않는다. 빅뱅 플라즈마가 식으면서, 우주는 불투명 상태에서 투명한 상태로 상전이를 이룬다. 138억 년 전의 일이다. 이 때 빛의 산란면이라는 게 생겼다. 우주배경복사가 이때 빠져나와 우주 전체로 흩어진 빛의 잔상 아닌가. 문제는 빛의 속도에 우주의 팽창이 더해진 결과, 빛의 산란면은 우리에게서 138억 광년이 아니라 약 460억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상황을 이렇게 상상해보라고 한다.


바다에 떠 있는 사람에게 수평선이 보이지만 그게 바다의 전부가 아니듯, 우리가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우주는 반지름이 138억 광년인 공모양이다. 하지만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른 행성에 사는 누군가도 반지름 138억 광년인 자기만의 우주 지평선에 에워싸여 있을 것이다. (152쪽)


저자의 말에 따르면, 중력파 망원경이라는 걸 우리 인류가 개발 중이라고 한다. 중력파는 빛의 파동이 아니라 시공 자체의 파동이므로, 나아가는 데 있어 한계가 없다. 그래서 만약 중력파 망원경이라는 게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빛이 절대 투과하지 못하는 빛의 산란면 너머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내용은 블랙홀에서 뭔가가 빠져나오는 방법을 네 가지나 제시한 부분이다.


1. 양자 점프

2. 블랙홀의 지평선을 통과한 입자들은 통과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관찰 중이 아닐때, 모든 경로를 지나는 입자의 대부분은 블랙홀 지평선 외부를 지나갈 테니까.

3. 지평선 안쪽과 바깥쪽 진공이 달라서, 카시미르 효과에 의해 블랙홀의 지평선이 안쪽으로 밀리면서 블랙홀이 쪼그라든다. 쓰레기통이 줄어들었으니 뭔가가 빠져나오는 건 당연한 일.

4. 호킹 복사. (444~446쪽 요약)


무식한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저 네 가지가 과연 정말로 서로 구별되는 네 가지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특히 관찰 중이 아닐 때 입자가 '모든 가능한 경로'를 지나가는 것은, 양자 점프를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이미 많은 책에 소개된 호킹 복사의 사례는 쌍생성의 경우를 다루고 있지만, 양자 점프로 인한 호킹 복사도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뭐, 잘 모르는 아마추어가 하는 얘기니까 너무 심각하게 듣지는 마시길.


노자가 말했듯이, 이름이라는 것은 그저 이름일 뿐이다(名可名非常名). 그러나 우리는 때로 그 이름의 노예가 된다. 논리실증주의의 대변인, A. J. 에이어는 myself, yourself라는 단어 때문에 우리한테 'self'라는 실체가 있다는 착각이 생겼다고 말한다. 불어처럼 moi-même, toi-même였다면 생기지 않았을 오류다.


암흑물질(dark matter)이라는 명칭은 '물질(matter)'이라는 이름을 포함한다. 그래서 이것이 물질의 한 종류 아닌가 하는 착각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그러나 이것은 물질의 한 종류가 아니다. 반물질도 아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고, 아무도 그 정체를 모른다. 암흑물질은 우주의 팽창 속도를 계산해본 결과에 따른 추론일 뿐이다.


이름 때문에 생기는 범주 오류의 관점에서, 책에 나오는 다음 단락을 살펴보자.


시간 순서로 볼 때 인플레이션은 빅뱅 이전에 일어났다. 인플라톤장은 엄청난 초소형 우주를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짧은 시간 안에 거시적인 차원으로 바꿔 놓았다. 그러고 나서 인플라톤장과 인플라톤은 붕괴해서 E=mc2 공식에 따라 순수한 에너지가 되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되자 우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뜨거워졌다. 우리는 이렇게 빅뱅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빅뱅은 여러 장들을 들뜨게 만들었고, 이 장들은 나중에 오늘날 우리를 비롯해 만물을 구성하는 장들이 되었다. (465-466쪽)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발언이다. 빅뱅이란 이름이 무엇을 지칭하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대개의 사람들은 빅뱅 이전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있었든 간에, 우리의 우주와는 상관도 없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영역이다. 그야말로 '시초'이고 그 이전의 시공간은 허수가 상상의 산물이듯 우리와는 상관없는 세계의 일이다. 결국 위의 문장에서 저자가 말하는 '빅뱅'은 협의의 빅뱅, 즉 우주 극초기의 인플레이션 직후 일어난 대폭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단지 이름의 혼란으로 저렇게 무시무시할 정도로 색다른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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