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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an 25. 2021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

'인도적' 개입


세계사를 간단하면서도 만족스럽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보드게임, <Through the Ages>에는 정책 카드로 '인도적 개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성공하면, 상대 국가로부터 점수나 자원을 빼앗아 오는 카드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카드의 이름과 성능이 진화하는데, 예를 들면 기병이 탱크로 발전하는 식이다. '인도적 개입'은 '약탈'이 진화한 카드다. 다시 말하면, 기술과 문명에 발전에 따라 현대인들은 '약탈'을 '인도적 개입'이란 멋스런 말로 부른다는 것이다.


미국의 베트남 침공과 함께 냉전 시대 초강대국 최악의 갑질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들 수 있다. 역사 시간에 제대로 배우지 않으니 잘 모르고 있었는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그 성격이 미국의 베트남 침공과 매우 유사했다. 미국이 친미 정권 유지를 위해 베트남을 침공했듯, 소련은 친소 정권을 지키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진주했다.


남베트남 친미 정권이 역사에 유사한 사례를 보기 어려운 쓰레기 집단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소련도 비슷한 수준의 파쇼 독재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1973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들어서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공화정의 개혁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진 좌익계 군인들은 1978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이 정권은 남녀차별 철폐, 지역균형 발전 등 혁신적 의제를 도입했다. 문제는 이런 정책이 반이슬람적이었다는 데 있었다. 이에, 일부 이슬람교도들이 조직적으로 저항을 시작했다.


헤라트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제17군단을 진압 목적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제17군단은 정부 대신 종교에 충성하기로 결정하고 반란군에 가담한다. 헤라트 지방에는 소련인들이 일부 와 있었는데, 반란군은 이들을 죽이고 시체를 들고 퍼레이드를 벌인다. 소련은 광신도들을 직접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국경을 넘는다. 기나긴 아프간 외침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냥 주먹을 휘두르면 되지, 왜 이유를 댈까?


아마도 인류 역사의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은 제국주의와 파시즘일 것이다. 제국주의는 원래 경제적 이익을 동기로 하여 발생했다. 우생학, 사회적 진화론 등 제국주의를 과학으로 포장하려던 일부의 시도는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런데 그들은 왜 힘의 우위를 마음껏 사용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을까?


냉전까지 끝난 마당에 미국의 범지구적 침략을 규정하는 말로 문화적 제국주의가 널리 사용된다. 정말 강요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문화적 제국주의란 '즐기는 방식'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그 이전에 '사는 방식'을 남에게 강요하는 제국주의가 존재했다. 종교, 도덕, 사상에 기반한 제국주의다. 유발 하라리의 작명을 빌자면 이들은 모두 '집단적 서사'다. <호모 데우스>에서 그는 집단적 서사란 말도 집어던지고 그냥 종교란 단어를 쓴다. 냉전 당시 사상적 대립에 서려 있던 광기를 생각하면 종교란 단어가 대단히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 인간은 '집단적 서사'를 믿는 기묘한 특성 덕분에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 '집단적 서사'에 기대어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생존전략이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힘으로만은 권력을 유지할 수 없는 이유 역시 '집단적 서사'의 존재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다른 자를 죽여 없애는 풍토는 인류의 역사 그 자체만큼 뿌리가 깊다. 미신적 믿음에 기반하여 권력을 장악하던 족장에게, 그 믿음에 도전하는 것보다 무서운 위협이 어디 있을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뇌 기능의 엄청난 비중이 사회적 기능에 할당되어 있다. 사회적 맥락이 위험해질 정도로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생존의 문제다.



'생각의 정석'


오랫동안, 서구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 중화권에서는 주희가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생각의 정석을 만들었다. 아퀴나스에 반하는 성경 해석이나 주희와 다른 유학 이론은 죽음을 불러왔다. 아퀴나스가 해석 방법을 확립한 문서는 성경인데, 그 성경은 예수가 지은 것도 아니다. 귓속말 전하기 게임을 해보면, 인간의 말이 얼마나 부정확하게 전달되는지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몇 다리 건너 온 해석을 어떤 사람과 다르게 했다고 죽어야 한다니, 어이가 없지 않은가?


개인적인 생각인데, 예수나 공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아퀴나스나 주희를 증오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은 알료샤에게 예수가 정말로 살아 돌아오면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묻는다. 이반은 이야기한다. 예수는 대주교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당할 것이라고. 심지어 대주교는 그가 정말 예수란 것을 알면서도 죽일 것이다. 기독교란 바울과 아퀴나스와 그 후예들의 종교지, 예수의 종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자가 조선시대에 나타났다면 송시열과 그의 일당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텔리들에게 가장 히트한 상품으로는 역시 사회주의를 들 수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 자신을 넘어 남들에게 강요하려는 그 태도는 가히 종교적이다.


도덕률도 얼마든지 도그마가 되어 남들에게 강요된다. 칸트는 자신의 도덕률을 남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만약 칸트 광신도가 나타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정언명령을 지키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 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멍석말이는 주로 과실상규가 핑계였으니, 칸트 뺨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분열하는 제국>에서 콜린 우다드는 남북전쟁의 빌미가 된 것이 북측 양키들의 도덕적 제국주의라고 설명한다. 노예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청교도의 후예라고 자처하며 남부의 배덕적 행태를 바로잡으려는 양키들의 오만함이 없었다면 남북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을 위해 싸웠던 남부 레드넥들이 전쟁 직후 반대편으로 돌아선 것도, 양키들이 자기들 입맛에 맞게 국가를 개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리 옳은 생각이라도, 강요된다면 반감을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제품에 '바른 핫도그' 따위의 이름을 붙이는 식품업체를 혐오한다. 핫도그가 어떻게 바른 먹거리가 될 수 있느냐는 문제의식도 있지만, 자기가 파는 제품(만)이 '바른' 제품이라는 생각을 가진 자가 과연 제정신인지 의심스럽다. 인류 역사에 '정의'라는 단어만큼 오용으로 점철된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이 단어가 없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의미 없는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른'이라는 개념 역시 인류가 진화하여 극복해야할 악덕이다. 무지개 색깔에 바르고 바르지 않은 색깔이 어디 있나? 서로 다른 여러 색깔이 어울려 무지개가 되는 것이다.





<브레드위너>에도 등장하는 풀-이-차키 감옥. 카불 동쪽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 최대의 감옥인 이곳에는 300여명의 죄수들이 수감되어 있는데, 경비병은 400명에 이른다.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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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정의길, <이슬람 전사의 탄생>

콜린 우다드, <분열하는 제국>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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