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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Feb 02. 2021

빈손으로 문명 만들기


[책을 읽고] 라이언 노스의 <문명 건설 가이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 왔는데 기계가 고장나 과거에 갇혀버렸다. 조금이라도 문명의 편리함을 되찾아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실용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책이 라이언 노스의 <문명 건설 가이드>다.


저자는 이 책을 직접 쓴 것이 아니고 공사 현장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우연하게도 그 책의 저자 이름도 라이언 노스였을 뿐이다.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나르'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그대로 필사해서 <돈키호테>의 '저자'가 된 피에르 메나르 말이다.


타임머신이든 타임슬립이든, 과거로 떨어지는 공상은 나도 즐겨하는 것이라서, 이 책은 내 취향에 딱 맞았다. 게다가 재담 넘치는 글솜씨가 읽는 재미를 더한다.


주위에 산소가 있을 때 효모는 노폐물로 이산화탄소를 생산합니다. 밀가루 속의 글루텐이 이 이산화탄소를 붙잡아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 효모는 반죽을 치대고 숙성하는 동안 행복하게 먹고 마시다가 불 위에서 일시에 전멸할 것입니다. (중략) 당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빵 덩어리에는 수백만 마리의 미생물 시체가 들어 있습니다. (304쪽)


물론,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요즘 우리가 먹는 빵에는 효모 대신 베이킹파우더가 들어갈 테니 안심해도 된다. 빵 하나를 바르셀로나나 베른에서 파는 가격보다 5배 비싸게 파는 악덕업자들이나 빵에 효모를 넣는다고 주장할 뿐이다. 게다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효모를 넣지 않아 부풀지 않은 빵이 더 맛있었다고도 했다. (화덕에서 구운 피자나 난이 얼마나 맛있는지 생각해보면, 당연한 얘기다.)


인큐베이터와 무선에 관해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인큐베이터는 기원전 2000년경 달걀의 부화를 돕는 장치로서 집이나 동굴 형태로 처음 발명됐습니다. (중략) 그 뒤 4,000년이 지나서야 너무 일찍 태어난 인간 아기에게도 엄마의 자궁을 흉내낸 따뜻한 환경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497쪽)
무선이 발명되기 전에는: 음악이 듣고 싶으면 집을 떠나 콘서트장에 가서 음악을 연주할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 직접 들어야 했습니다. (576쪽)


***


이 책은 우연히 저자와 이름이 같은 미래인이 지은 것이므로, 책에 나오는 일부 과학기술은 2021년 현재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것들이다. 히틀러가 부활시키려다 실패한 거대 소, '오록스'는 2010년에 밝혀진 게놈 정보를 이용해서 '2033년에' 복제에 성공'했으며,' 유리가 액체가 아니고 고체라는 사실은 타임머신 제작사이기도 한 '크로노틱스솔루션'의 과학자들이 '실험적으로' 입증했다. (언제 그랬는지는 안 나온다.)


유리판 하나를 괴어놓고 갔다가 2,000만 년 후에 돌아와도 여전히 유리판이지, 바닥에 유리 웅덩이가 고여 있으리라고 기대하면 안 됩니다. (359쪽)


사실, 유리가 액체인지를 '실험적으로' 증명하려면 바로 저 실험을 해야 할 것이다. 헨쇼의 <세상의 모든 공식>에 나오는 유명한 역청 실험에서는 역청 한 방울이 떨어지는 데 대략 8~9년이 걸렸고, 당연한 말이지만 도중에 실험 담당 교수가 사망하여 그 유지를 다른 사람들이 잇고 있다. 유리를 놔두고 유리 웅덩이가 생기는지 확인하려면 실험 전담 가문을 지정하든지 재단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돈을 누가 대느냐는 물론 별개의 문제다. 그걸 했다고 하니, '크로노틱스솔루션'은 돈도 많고 시간도 많은 회사이거나 (타임머신이 서기 몇 년에서 왔는지 우리는 모른다) 뭔가 기발한 방법을 알아낸 것이 틀림없다. 물론, 틀린 실험을 하고 진리를 발견했다고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


극우 만화이자 드라마인 <닥터 진>을 보면, 과거로 슬립한 주인공이 페니실린을 만들어낸다. 페니실린을 '만드는' 방법은 사실 별로 복잡하지 않다. 페트리 접시에 젤라틴으로 굳힌 육수 배지(그러니까, 고체 배지)를 넣고, 거기에 콧물을 좀 첨가하면 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가 되고 싶다면 코를 풀어 페트리 접시에 닦아라. (329쪽)


이제, 페트리 접시들을 여기 저기 다양한 곰팡이에 노출시킨다. 곰팡이 핀 사과 옆이나 쓰레기장 근처 창가가 좋겠다. 여러 페트리 접시 중에서 둥근 고리가 생기는 접시를 찾아야 한다. 둥근 고리는 콧물 속의 세균이 푸른 곰팡이에 밀려 후퇴한 자국이다. 이 곰팡이를 채취해 액체 배지(그냥 육수)와 함께 밀봉하면 푸른 곰팡이가 잘 자랄 것이다.


육수를 주사할 수는 없으므로, <닥터 진>에 나오는 것처럼 페니실린을 정제해야 한다. 닥터 진은 간장 공장에 부탁해서 크로마토그래피 정제로 항생제를 대량 생산한다. 미래에서 온 인간에게 간단한 설명만 듣고 뭐든지 뚝딱 만들어내는 닥터 진 유니버스의 왜놈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곰팡이 용액을 정제하는 방법으로는, 페니실린이 에테르에 잘 녹는 성질을 이용하면 된다. 곰팡이 용액을 에테르와 섞어, 물을 버리면 된다. 이 방법을 반복해서 순도가 (비교적) 높은 페니실린을 정제해낼 수 있다. 닥터 진의 크로마토그래피는 그냥 멋져 보이려고 한 짓거리일 뿐이다. 그런데 닥터 진이 이 방법을 썼다 하더라도 페니실린을 실용화하는 것은 여전히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심하게 감염된 상처 하나를 치료하기 위한 페니실린을 생산하려면 플레밍의 곰팡이 배양액이 2,000리터나 필요합니다. (331쪽)


다행히 1942년에 어떤 미국인이 200배 강한 페니실린을 만드는 곰팡이를 발견한 덕분에 항생제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곰팡이에 X선을 쬐어 돌연변이를 유도한 것이 '우연히' (내 표현이 아니라 저자의 표현이다) 성공한 것이다. 닥터 진의 허접한 곰팡이로는 매독은커녕 좀 심하게 다친 상처도 치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재미도 있고, 몇몇 재미있는 사실도 배울 수 있는 책이지만 일견 쓸데없어 보이는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시작부터 빵 터지는 유머가 나왔기 때문이다. 과거에 불시착했다면, 우선 어느 정도 기술이 발전한 시대인지, 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시대이기는 한 건지 알아봐야 한다. 호기성 세균이 등장하기도 전 시대라면 그냥 질식해 죽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알아보는 간단한 표가 나오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공룡이 있습니까? → 그러니까, 새는 있습니다. → 질문은 예전에 박물관에서 봤던 종류의 공룡이 있는지 묻는 겁니다. → 네, 새 박물관에서 봤어요. → 이래서 아무도 당신이랑 놀지 않는 겁니다. (33쪽)


푸하하하!


"다 웃었냐?" (출처: Daily Mail)


*****


이하, 그냥 잊어버리기에는 아까운 내용들을 정리했다.


개는 주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다. 영장류도 못하는 일이다. 아직 입증은 되지 않았으나, 개의 일부는 스스로 인간에게 길들여졌을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추측한다. (190)


러시아의 여우 길들이기 프로젝트는 성공하여, 실험 개시 46년만에 새로운 세대의 여우 100%가 인간에게 길든 상태로 태어났다. (191)


달걀이 먼저다. 돌연변이로 등장한 최초의 닭은 달걀 상태에서 이미 그 유전자 변이를 가지고 있었을 테니. (201)


증류는 그렇게 깔끔한 과정이 아니다. 혼합 용액이라도 끓는 점은 하나다. 다만, 용액이 끓을 때 끓는점이 낮은 액체가 가장 많이 증발할 뿐이다. 그래서 정제 과정은 반복 노가다의 연속이다. (266)


말 발굽은 손발톱처럼 계속 자란다. 편자는 발굽에 두드려 박는 것이기 때문에, 말에게 고통은 없다. (272) - 아플 줄 알았다!


소금물에 달걀흰자를 넣고 휘저으면 물 위에 불용성 물질을 가둔 거품이 형성된다. 이 거품을 걷어낸 다음 증발시키면 훨씬 순도 높은 소금을 만들 수 있다. '레드 솔트'처럼 진흙 섞인 소금 말고 더 순도 높은 소금 말이다. (318)


갱도 가스누출 감지에 카나리아를 쓰는 이유는 작은 새의 신진대사가 인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누출가스에 새가 죽는 시점이라도, 인간들에게는 충분히 도망칠 시간적 여유가 있다. (344)


불가마는 신 문명 건설의 핵심이다. 불가마로 해금되는 기술들의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유리, 강철, 편자, 수차, 풍차, 배터리, 시멘트와 콘크리트, 소금 등. 불가마가 없다면 이들 기술은 물론 이들이 해금하는 다음 기술들도 얻지 못하니 우선 불가마 쪽으로 테크를 타자. (358, 776)


자동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지 않고 매끄럽게 움직이는 것은 플라이휠(막대를 꽂은 바퀴) 덕분이다. (394)


시멘트도 훌륭한 건축자재이지만, 여기에 자갈 등 쓰레기를 넣은 콘크리트는 훨씬 훌륭하다. 건더기들이 하중을 감당해주기 때문이다. (504)


숯가루가 담긴 통 안에 철을 넣고 일주일 동안 섭씨 700도로 가열하면 강철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표면만 강철이므로, 모루 위에 놓고 망치로 치대야 한다. (511)


'퍼지 논리'라는 것은 진실의 정도까지 포함한다. 0.9는 거의 참이고 0.0001은 사실상 거짓이다. (639) - 정식화가 안 돼서 지금은 거의 사장된 이론.


핵융합으로 철이 만들어질 때는 생산되는 에너지보다 소모되는 에너지가 더 크다. 그래서 철이 만들어지는 별은 대개 하루도 지나지 않아 죽는다. (653)


환부가 뜨겁거나 아프거나 고름이 나오면 환부를 높이 올리고 더운찜질을 하고, 환부가 가렵거나 따갑거나 맑은 액체가 나오면 찬찜질을 한다. (694) - 생활의 지혜


간단 이온음료 만들기. 물 1리터에 설탕 25그램과 소금 2.1그램을 넣는다. (696) - 헉, 설탕을 그렇게나 많이?


기도가 막히는 것을 조치/예방하는 '회복 자세' - 환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기에게 가까운 환자의 팔을 위로 올려서 팔꿈치를 직각으로 구부리고 손바닥은 위로 향하게 한다. 환자의 반대쪽 팔을 가져와 가슴을 가로질러 손등을 자기에게 가까운 뺨에 대고 그 상태로 붙잡고 있는다. 다른 팔로 자기에게서 먼 쪽에 있는 무릎을 끌어 올리고 발은 바닥에 닿은 채로 둡니다. 이제 환자를 자기 쪽으로 굴려 옆으로 눕게 한다. 이때 자신이 붙잡고 있는 환자의 팔은 환자의 머리를 받치도록 하고, 위로 끌어 올린 발과 무릎은 옆으로 눕혀서 환자의 몸이 뒤로 젖혀지는 것을 방지한다. 이제 환자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려 머리를 뒤로 젖히면 기도가 열리면서 체액 등이 흘러나온다. 환자의 입을열고 기도를 막는 것이 없는지 다시 확인하고, 남은 것이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제거한다. (701-702)


출처: 대한적십자사 응급처치 교재



현재는 물에 빠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공 호흡을 권장하지 않는다. (704)


2만 헤르츠는 어렸을 때나 들리는 것이고, 어른이 되면 16,000 헤르츠 정도가 한계다. (720) - 이러니 <오디션> 같은 만화에 청력 괴물 같은 게 나오는 것.


근대 음계의 기본이 되는 국제 표준 A음, A440은 이름 그대로 주파수가 정확히 440헤르츠인 음이다. (725)


가산기(덧셈기계)는 XOR 게이트와 AND 게이트로 만들 수 있다. XOR은 합계, AND는 자리올림을 담당한다. 이 가산기를 다른 가산기와 XOR로 연결하면 '전가산기'가 되는데, 이로써 몇 자리의 숫자든 표현할 수 있다. 전가산기 하나를 추가할 때마다 다룰 수 있는 2진수의 자릿수가 2배가 되므로, 40개 정도만 연결해도 천문학이 가능하다. (2^40 = 약 1.1조) (762-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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