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말 Mar 08. 2021

우주의 시작은 생명이다

[책을 읽고] 바이오센트리즘 / 로버트 란자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간단한 전략을 제시하겠다. 첫째, 이 책의 저자는 자의식 과잉의 광인이다. 책의 1/3 분량에 달하는, '스스로 쓴 위인전'을 견뎌야 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경험의 일부분이 될 것임을 명심하라. 둘째, 만약 그런 부수적 경험을 과감히 생략하고 이 책의 정수만을 받아들이고 싶다면, 책의 제8장에서 제11장까지만 읽으면 된다. 심지어 제9장은 생략해도 된다.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충고해줬더라면, 나도 이 책의 일부분만을 읽고 대단히 흡족해하며 별 다섯 개의 평점을 매겼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별 다섯 개를 매겼다. ㅋㅋㅋ)


***


이 책에서 제대로 된 내용은 제8장에서부터 시작한다. 강한 인류원리를 생명중심주의라고 선언한 후, 저자는 시간과 공간이 인식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상당히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공간에 관해서는 반박을 좀 하고 싶기는 하다.)


그러나 워밍업 차원에서, 일단 저자가 버클리식 관념론을 어떻게 펼치는지 살펴보자.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졌다. 그런데 아무도 보지 않았고 듣지 못했다면, 과연 그 사건은 일어난 것일까? 버클리식 인식론 문제 제기에 흔히 등장하는 바로 그 사례다.


소리란 무엇인가? 전자기파의 일종이다. 전자기파 중에서 매우 낮은 주파수를 가진 녀석들로, 우리 인간은 그중 대략 20헤르츠에서 2만 헤르츠 사이의 전파를 귀라는 감각기관으로 잡아낸다. 어떤 나무가 30헤르츠 정도의 대단히 낮은 저주파 소리를 내고 쓰러졌다고 가정해보자. 이 나무는 쓰러지는 방식에 따라 20, 내지는 15헤르츠의 전자기파를 발산할 수도 있다.


물론 초당 15회 진동하는 파동과 30회 진동하는 파동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후자는 들을 수 있지만 전자는 듣지 못한다. 그 이유는 두뇌 신경계가 설계된 방식 때문이다. 고막의 진동으로부터 자극을 얻은 뉴런은 전기 신호를 두뇌로 송출하고, 그러면 두뇌는 그 신호를 소리로 해석한다. 이 전제 과정은 분명하게도 공생적(symbiotic) 경험이다. (58쪽)


그렇다. 나무가 쓰러지면서 발산한 전자기파는 주파수 15헤르츠 영역에 걸칠 수도, 30헤르츠 영역에 걸칠 수도 있다. 전자는 우리와 상관 없는 현상이지만, 후자는 우리에게 소리라는 감각 경험으로 다가온다. 이 논의는 더 직관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색맹인 사람에게 보이는 세계가 그렇고, 아이들과 장달봉은 들을 수 있으나 대개의 어른들은 듣지 못하는 2만 헤르츠에 가까운 고주파음이 그렇다. 이 모든 것이 어떤 이에게는 현상이고, 어떤 이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콧방귀를 뀌며 "아무도 없어도 나무는 쓰러지면서 소리를 내지"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아무도 없다는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나무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는 자신을 가정하는 것이다. (59쪽)


재미있지 않은가? 버클리는 신이라는 전지적 존재를 내세워 현상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고, 들뢰즈는 그 자리에 타자라는 존재를 위치시켰다. 라플라스는 자신만만하게 "그 가정은 필요치 않다"고 단언했지만, 저자는 그가 틀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


이 책의 한계는 분명하다. 대니얼 데닛이 지적하듯, 저자는 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여기서는 의식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두자. 다만 모든 것에 선행하는 의식이라는 존재는 증명이 힘들거나 불가능할 뿐만이 아니라, 기존의 이원론과는 근본적으로 양립불가능하다는 점만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94쪽)


대니얼 데닛의 <마음의 진화>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의식을 규명하려는 지적 노력이 (엄청나게 재미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과업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저자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겠다고, 명백히 선언한다.


손을 움직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손을 움직이는 뇌파가 감지되는 현상을 보여준 벤저민 리벳의 유명한 실험은, 우리가 무언가를 마음속으로 결정하기 '이전에' 우리 몸(신경계)이 반응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리벳의 한 마디는 인간 의식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인 자유의지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리벳은 자유의지에 대한 이러한 착각은 두뇌에서 일어나는 연속적인 사건들을 습관적으로 회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99쪽)


이를 마음대로 비틀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외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사실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99쪽)


많은 상식적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유아론이 결정적으로 반증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같은 논리의 선상에서 버클리의 관념론을 반증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버클리의 관념론이 적어도 현대에 있어 주류적 사고방식이 아니라는 것 정도다. 내가 보기에 로버트 란자의 소위 '생물중심주의'는 버클리 철학의 논리를 그대로 빌려와 '신'의 자리에 '생명', 더 정확히 말하면 '의식'을 가져다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다. 그의 주장을 조금 더 살펴보자.


***


이 책의 1/3을 차지하는 저자 자신의 무용담은 당연히 무시해도 좋겠지만, 문제는 책의 다른 부분, 즉 '생물중심주의'를 설명하는 부분에도 무시할 만한 발언이 많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다음 문장은 저자 자신도 무슨 의미인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관찰 대상이 클수록 파장은 더 짧아진다. 거시 세상에서 사물의 파동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짧다. (132쪽)


양자적 중첩의 한계를 설명하려고 한 듯 보이지만, 적어도 이 문장은 그가 말하려는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한다. 말을 멋지게 하려고 의미를 모호하게 만드는 게 과연 철학자나 과학자가 할 일인가? 이런 헛소리를 포함시켜서 이 책이 과학책이 아니고 에세이처럼 보이게 해서 그가 얻을 이득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사실 그의 무용담에 대해 적용하면 더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 도대체 자의식 과잉에 넘치는 자서전을 독자에게 강요해서 저자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나심 탈렙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시답잖은 주장을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되는 듯이, 그것도 대단히 거만한 말투로 '설교'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각 챕터는 인용문으로 시작하는데, 예를 들면 제3장의 인용문은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그런데 제4장의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신은 누가 창조했을까? _로버트 란자


로버트 란자가 누굴까?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저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줄리언 반즈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말을 명언인 양 써놓은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저 말을 한 것이 과연 로버트 란자뿐일까 하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나르'를 흉내내보는 것일까? 로버트 란자의 명언이 서두를 장식하는 챕터는 이외에도 여러 개가 더 있다. 다행인 것은, 그런 챕터들은 대개 자신의 무용담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서두에 로버트 란자의 '명언'이 나오는 챕터는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내가 당했던 불행을 당신은 피할 수 있다.)


***


저자는 생명중심주의의 강력한 증거로 이중슬릿 실험을 든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어떤 입자(물론 동시에 파동이다)를 두 개의 슬릿에 통과시킬 때, 관찰이라는 개입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현상이다. (개별적인) 관찰이 개입하면 이들은 입자처럼 행동하지만, 관찰이 개입하지 않으면 전형적인 파동의 간섭무늬를 그려낸다. 몇 년 전에 읽었던 책에서는 버키볼(buckyball)이라는 탄소원자 60개짜리 덩어리까지도 이런 '양자적 현상'을 보였는데, 그 사이에 더 많은 실험이 이루어져 지금은 더 큰 분자도 이런 현상을 보인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모두들 잘 알고 있듯이, 거시 차원의 물체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볼링공 두 개로 이중슬릿실험을 해서 성공한 사례를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각설하고, 이제 생물중심주의적 설명을 들어보자. 이중슬릿실험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되었는데, 그 어떤 경우에도 관찰종속적인 결과를 내놓았다. 여기에서 살펴볼 실험은 한쌍의 '얽힌' 광자, 예컨대 쌍생성에서 발생한 두 개의 광자를 사용한다. 두 개의 광자는 모든 물리적 특성이 동일하나, 단 하나, 스핀 방향만이 다르다. 아인슈타인이 보어에게 던졌던 마지막 질문, 즉 EPR로 인해 유명해진 것처럼, 이들은 우주를 가로지르는 지름의 반대편에 있어도 '얽혀' 있다. 즉, 하나의 입자가 어떤 스핀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 확률파동함수가 붕괴되면서 다른 입자의 스핀도 즉각 결정된다.


출처:  https://laser.physics.sunysb.edu/_amarch/eraser/index.html


레이저를 베타붕산바륨(BBO) 수정에 쏘면 서로 얽힌 하나의 광자쌍이 나온다. 두 광자를 각각 p, s라고 부르자. 이중슬릿(double slit)을 광자 s의 경로에 가져다 놓는다. 이렇게 하면, 광자 s는 스크린 Ds에 간섭무늬를 만든다. 관찰이 개입되지 않았으므로 당연하다.


출처:  https://laser.physics.sunysb.edu/_amarch/eraser/index.html



이제 광자 s의 스핀을 측정하는 장치, QWP를 이중슬릿 앞에 가져다 놓는다. 예상대로, 이제 광자 s는 스크린에 간섭무늬를 만들지 않는다. 입자가 이중슬릿 중 한쪽을 통과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광자를 단 한 개만 쐈다면 하나의 점이 그려질 것이고, 여러 개를 쐈다면 정규분포 곡선이 그려진다.


이 상태에서, '광자를 조작하지 않고' 광자 s의 경로 정보를 알 수 없게 만들어 보자. 광자 p의 경로에 편광판을 멀찍이 놔둔다. 이렇게 하면 동시계수기(coincidence counter)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일부 광자가 편광판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스크린 Dp를 때리는 광자 중 어떤 것이 광자 s와 얽힌 짝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즉 이중슬릿 중 어느 쪽을 통과한 것이 스크린을 때리는 광자 p의 짝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따라서 확률파동함수가 붕괴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스크린 Ds에는 간섭무늬가 나타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광자 s와 관련하여 아무런 조작을 하지 않았다. 광자 p를 조작하여 그의 짝 광자인 광자 s에게 얽힘 정보를 전달하지 못하게 한 것뿐이다.


여기에서 한 단계를 더 나가 보자. 광자 s의 경로는 그대로 놔둔 채, 광자 p의 경로를 매우 길게 만든다. 그렇게 하면 광자 s가 스크린에 도착했을 때, 광자 p는 아직 자신의 스크린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가 된다. 광자 p가 아직 계수기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광자 s는 자신이 자신의 짝 광자로부터 정보 전달을 받을지 말지를 아직 확정하지 못한 상태다. 광자 p가 측정당했다면, 광자 s도 즉시 확률파동함수를 붕괴시키고 입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즉, 간섭무늬를 그리지 말아야 한다. 광자 s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결과는 앞선 실험과 똑같았다. 광자 p가 아직 스크린에 도달하지 않았음에도, 광자 s는 자신있게 입자처럼 행동했으며, 간섭무늬를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 상태에서 광자 p의 경로에 편광 스크램블러를 설치해보자. 이 장치는 편광을 다시 흐뜨려놓아 광자 p에 대한 측정을 다시 무효화시키는 장치다. 이렇게 했더니 이번에는 광자 s가 간섭무늬를 만들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자신의 짝인 광자 p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광자 s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광자 s가 먼저 스크린에 도착한 시점에서, 광자 p가 측정을 당할지 아닐지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아인슈타인의 EPR 문제 제기, 그리고 이에 따른 보어의 답변과 벨의 부등식 증명으로 인해 양자 얽힘은 하나의 확고한 진리로 정립되어 있다. 두 개의 입자가 우주를 가로지르는 수백 억 광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입자가 측정되는 동시에 다른 입자의 특성도 결정된다. 이를 두고 광속을 능가하는 정보 전달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광속을 능가한다는 것은, 비록 상대성 이론에 반한다고는 해도 어쨌든 논리적으로는 '시간을 거스른다'는 의미다. 얽힘 현상은 단지 광속을 초월할 뿐 아니라, 정말로 시간을 거스르는 것이 아닐까?


위의 실험으로 돌아가 보자. 광자 s는 '미래에 일어날' 광자 p의 운명을 확인한 다음,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서 간섭 무늬를 그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했다. 분명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 해석을 기억하고, 다음 논의로 넘어가 보자.


***


시간의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 현상, 즉 허구라는 주장은 여러 학자들이 제기해 왔다.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주제가 그것이고, <시간 연대기>에 나오는 바버의 '플라토니아' 이론 역시 무수한 순간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렇게 주장한다. 존재하는 것은 순간들 뿐이며, 그걸 시간의 흐름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다. 스냅 사진 20~30개를 빠르게 돌려 영화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이 관점에서 우주의 역사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수십 년 전, 인류는 '빅뱅'을 이론적으로 제시하고 우주배경복사를 통해 확인했다. 그리고 즉시, 인류의 집단지성 내지 집단의식은 138억 년 전 빅뱅을 시작으로 하는 우주의 역사를 의식 안에서 재구성했다. 다시 말하면, 불확정 상태에 머물던 우주라는 '객체'는 인간 의식에 의해 수십 년 전 확정되어 138억 년 전 시점으로 회귀해 '탄생'했다.


이 책에 대한 수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했듯, 이런 식의 이야기가 과연 무엇에 도움이 되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발상 전환이 재미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영화 <맨 프롬 어스>의 주인공 존 올드먼이 말하듯, 이 세상을 구성하는 원리(양자역학)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다. 따라서 되도 않는 소리는 당장 집어치우라고 말하면서,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에 등장하는 수사(monk)처럼 분노하여 밥상 위로 뛰어올라가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심지어 시간이 허상이라는 생각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카를로 로벨리나 로버트 란자, 그리고 <불멸에 관하여>의 스티븐 케이브가 정말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시간과 공간은 생명체가 주변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 활용하는 근본적인 개념이다. 그게 전부다. 거북이가 껍질 속에 살 듯 우리는 언제나 그러한 개념 속에 산다. 그러나 생명체와 무관하게 사건이 일어나는 객관적인 외부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18쪽)


***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저자는 공간도 허상이라 말한다. 현재까지 가장 인정받는 학설은, 아인슈타인의 가르침에 따라 공간을 중력장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데카르트적 좌표를 가진 정육면체에 매몰되는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공간이 '연체동물'과 같다는 비유를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로버트 란자는 공간이 허상이라는 주장을 어떻게 풀어낼까? 이번에 그가 사용하는 논리는 '언어 오류'다. 플라톤에서 시작되어 노년기의 비트겐슈타인이 종식시켰던, 바로 그 언어 착각이다.


우리는 색깔과 모양을 기준으로 이들을 개별적인 사물로 인식한다. 또한 포크(fork)의 가지(tine) 부위는 이를 일컫는 이름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독립된 부분처럼 보인다. 반면 손잡이와 가지를 잇는 곡선 부위를 가리키는 이름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부분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 (233쪽)


따라서, 공간이란 실체에 관한 우리의 착각은 멀리로는 플라톤, 더 가까이로는 데카르트가 불러일으킨 환상이며, 이는 비트겐슈타인과 수많은 언어철학자들, 그리고 끈이론 지지자들과 위상수학자들이 싸우는 불구대천의 원수이기도 하다.


당연한 인간의 심리겠지만, 로버트 란자와 같이 자의식이 폭발하는 사람의 주장을 우리는 좀 더 세세하게 뜯어보게 된다. 싫은 사람의 헛점을 잡고 싶은 당연한 심리다. 그래서 로버트 란자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날릴 때는, 그것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허영에서 비롯된 것인지 한번 의문 부호를 던지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모든 사물과 생명체가 사라질 때, 무엇이 남는가? 그러면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241쪽)


쉬운 답은 '아무것도 없다'가 될 것이다. 모든 물체가 사라지면 중력장이라는 것도 사라질 테니까. 알고 묻는 거겠지?


***


이 책으로부터 해방감을 얻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생물중심주의를 주창하면서 저자는 물리학계의 대통일이론 탐색을 쓸데없는 일이라 치부한다. 뇌의 비밀을 다 파헤치기 전까지는 (강한) 인공지능의 구현도 어림없다고 말한다. (자의식 과잉의 저자가 레이 커즈와일이나 페드로 도밍고스를 읽었을 리 없으니 용서해 주자.) 또한 의식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학의 과제라고 말하면서, 양자역학이 그 일부가 될 것이라 주장한다. (그렇다면, 로저 펜로즈의 조화 객관 환원 이론에 관한 책은 좀 읽었을까? 설마.)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단언컨대, 위대한 과학자 중에 오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아이작 뉴턴도 과학적 발견에 대해서는 겸손했다. 데이터를 초월적인 속도로 쌓아올리는 지금의 시대라서 이런 책도 출판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다. 나는 작은 내러티브도 환영한다. 편협한 속물의 의견이라도 들어보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더구나 이 정도로 재미있는 이론이라면 유희 차원에서라도 환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을 읽고] 옐 아들러 <은밀한 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