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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Mar 23. 2021

고발 르포인 줄 알았더니
막장 드라마

[책을 읽고] 타겟티드 / 브리태니 카이저


오바마가 상원의원 후보로 나왔을 때, 그의 홈페이지를 제작했다는 저자는 열혈 민주당 지지자다. 그런 그녀가 브렉시트 지지층과 미국 공화당을 위해 선거전략을 짜는 홍보회사의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가족들이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그녀는 항변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항변하고 또 항변한다. 자신은 정말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돈이 필요해 어쩔 수 없었다고.


이 책은 저자의 수기다. 그런데 마치 소설 같다. 사실이라 믿기 힘든 내용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믿기 힘든 것은 페이스북이 개인정보 보호 의무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라든가,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가 증오 정치를 선동하기 위해 데이터를 이용하기 때문이 아니다. 믿기 어려운 것은 상사인 알렉산더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그와 회사에 충성하는 저자의 태도다.


잘된 일은 자신의 공으로 돌리고, 잘못된 일은 부하에게 뒤집어 씌우는 상사, 알렉산더. 그는 지진으로 연락이 두절되었던 부하 직원과 연락이 재개되자, 지진을 핑계로 놀게 되었으니 좋지 않느냐고 말하는 수준의 파렴치한 인물이다. 박봉에도 야근으로 건강을 해쳐가며 전 세계를 뛰어다니며 일을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다. 게다가 알렉산더는 종종 그녀에게 화를 낸다.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이, 자기는 화는 내지만 뒤끝은 없다나. 그래도 그녀는 묵묵히 회사와 상사를 위해 일한다.


멕시코 지사를 만들기 위해 맨땅에 헤딩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날아온 CEO 알렉산더는 그녀에게 또 소리를 지른다. 필요한 경비조차 지급하지 않았으면서 왜 아직도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느냐고 화를 낸다. 당장 해고하고 싶지만, 인력이 부족하니 계속 일하라는 말과 함께, 그는 그녀에게 멕시코 사업에서 손 떼라는 말까지 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약속했던 보수조차 지급을 미룬다. 드디어 화가 끝까지 치민 그녀는 그에게 외친다.


"엿이나 먹어라! 이 나쁜 놈." 그리고 의자를 밀치고 소지품을 챙겨 식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460쪽)


이 다음 장면이 상상이 되는가? 내가 왜 이런 뻔한 질문을 할까? 놀라지 마시라. 이 다음 장면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알렉산더의 지시대로 영국 본사로 돌아와 허드렛일을 하는 저자의 모습이다. 심지어 연봉이 대폭 깎여 처음 계약직으로 일을 할 때 수준으로 돌아갔다. 모욕감을 느꼈다고 말하면서도 알렉산더의 지시에 따르는 저자의 모습이, 단지 계약관계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직장인들의 서글픈 자화상에 불과한 것일까?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라는 회사는 페이스북의 개인정보를 활용해서 브렉시트 국민투표와 미국의 여러 선거에 영향을 끼쳤다. 페이스북과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가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사태를 어떻게 무마시켰지만, 2016년 미국 대선 직후 이 스캔들은 다시 부활한다. 페이스북의 자료 삭제 요청에도 불구,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측은 정보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를 이용해 미국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었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의 CEO로서, 알렉산더 닉스는 미국 국회 청문회에 출석한다. 답변 과정에서, 그는 자신과 함께 일했던 저자의 이름을 여러 차례 거론한다.


"도대체 브리태니 카이저가 누구입니까?" 알렉산더는 침을 삼켰다. "브리태니 카이저는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의 직원이었습니다." 나에게 이 발언은 특히 중요했다. 그는 분명하게 "직원이었다."라고 과거 시제로 답변했다. (475쪽)


처음에는 돈이 없어서, 그리고 데이터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나중에는 계속해서 미뤄지는 '미래의 영광', 그리고 한번도 지급된 적 없는 보너스를 기대하며 참았다. 나이지리아에서 더러운 독재자를 위해 일하는 역겨움을 무릅썼고, 멕시코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받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알렉산더의 고함뿐이었다.


저자가 과연 이 책 원고를 몇 번이나 읽었을까 나는 생각해본다. 그녀와는 처한 상황이 전혀 다르고, 성별까지 달라서인지 몰라도, 나는 고약한 상사와 악독한 회사를 떠나지 못하는 그녀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한 가지 가능성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바로, 알렉산더라는 상류층(posh) 영국 남자의 미남계에 걸린 사회초년생 커리어우먼, 아마도 그것이 그녀의 상황을 설명하는 최선의 묘사 아닐까.


분명히 다시 강조하지만, 그 역겨운 고용관계를 그녀는 끝내려고 한 적이 없다. 청문회에서 저자를 '과거 직원'이라 칭했던 알렉산더는 그녀에게 해고 통지서를 보낸다. 그것도 과거 날짜로 말이다. 계속해서 끝내고 싶었지만 끝내지 못했던 관계를 저쪽에서 끝내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녀는 복수를 결심한다. 내부고발자로서 기자와 인터뷰를 한 것이다. 그리고 기사가 나오기 직전,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내부 고발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내부고발자들은 불행한 삶을 살았고, 살고 있다. 저자도 자신의 운명이 줄리안 어산지와 같이 될까 두려워한다. 그녀의 내부 고발은 자발적이지 않다. 궁지에 몰려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다. 이런 사람을 진정 내부 고발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 지경이다.


그녀는 데이터를 이용해 선거를 돕는 회사에 다녔지만,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을 사용할 줄도 모른다. 책 말미에서 그녀는 데이터에 관한 우리의 권리를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는가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정말 소름 끼칠 수준으로 얄팍한 몇 마디뿐이다. 데이터를 이용해서 '초점 홍보'를 하는 회사에서 오래 일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전문성은 바닥 수준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 위키리크스의 줄리안 어산지는 분명 논란을 몰고 다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폭로는 분명 정의로운 행동이었다. 그 행동의 결과로 그는 오랫동안 불행한 도피 생활을 했으며, 지금은 감옥에 있다. 브리태니 카이저라는 인물도 마찬가지다. 인격적으로 그녀는 조금도 훌륭하지 않다. 아니, <가난 사파리>의 대런 맥가비가 말하듯 그녀는 자신이 옳다는 확증편향에 빠져 자기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전형적인 '자칭 좌파'다. 그러나 그녀의 폭로 행위는 옳은 일이었다. 적어도 그걸 잊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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