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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pr 09. 2021

<1984>의 감시국가에 살고 싶은가?

[책을 읽고] <스노든>, <스노든 게이트>, <감시국가>



내부고발자는 외톨이나 낙오자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기보다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실패한 자기 인생에 좌절한 나머지 그런 행동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스노든은 그 반대였다. 스노든은 사람들이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들로 꽉 찬 인생을 살아왔다. 비밀 자료를 유출하기로 한 스노든의 결정은 오랫동안 사귄 여자친구, 천국 같은 하와이에서의 삶, 자신을 지지해주는 가족, 안정적인 직업, 두둑한 봉급,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삶을 포기한다는 걸 의미했다. (<스노든 게이트>, 105쪽)


내부고발은 대단히 칭찬받을 만한 행위다. 그러나 내부고발자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상황에 몰리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그 내부고발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집요하게 악용된다. 그리고 또 많은 경우, 내부고발자들에게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로 드러난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페이스북과 케임브리지 애널리틱스의 개인정보 유용 문제를 폭로한 <타겟티드>의 브리태니 카이저도 궁지에 몰려 더 이상 갈 곳이 없게 된 다음에야 폭로를 결심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스노든은 달랐다.


2011년 기준으로 '일급비밀' 취급 권한이 있는 미국인은 140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에드워드 스노든이 확보한 문서 다수를 열람할 수 있었다. 왜 다른 정보요원들은 이런 감시 프로그램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스노든>, 57-58쪽)


우리에게도 '법치'와 '준법'을 혼동하는 수준의 정권이 있었다. 그런데 스노든의 사례를 보면 미국도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투명성은 공무를 처리하고 공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에게 필요하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프라이버시가 필요하다. (<스노든 게이트>, 336쪽)


'법치'가 무슨 뜻인지 혼동하는 사람들처럼, '투명성'을 일반 시민에게 적용하려고 한 것이 미국 정부라는 얘기다. 억지를 부리는 사람과는 제대로 된 토론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억지가 단지 전략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진실한 믿음이라면, 즉 '법치'나 '투명성'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대하면 토론 자체가 불가능하다. 국가의 감시 행위에 관한 2:2 토론을 실은 책, <감시국가>에 나오는 마이클 헤이든이 바로 그런 자다.


약력만 봐도 한숨이 나오는 꼴통 군바리이자 스노든이 폭로한 바로 그 감시체계를 기획한 전 NSA 국장, 마이클 헤이든. 안전이 자유보다 더 소중한 가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죽은 다음에 자유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생존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최선의 가치라는 그로서는, 아마도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고치 안에서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일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런 억지가 그가 말하는 것들 중에 그나마 말이 되는 주장이다. 그는 전형적인 꼴통 토론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상대방이 말하지 않은 내용을 상대방이 말했다고 우기면서 비판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 우기면서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는 '근거'로 들이댄다.


다행히도, 다른 토론자들은 성숙한 토론의 모습을 보여준다. 앨런 더쇼비츠 교수는 시민적 자유의 옹호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일정 정도 자유를 희생해서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감시 활동에 제한을 두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제한이 예전보다는 완화되어야 하며, 그 이유는 기술의 발전이다.


나머지 두 명은 국가의 감시 권한이 대폭 축소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레딧의 공동 창립자인 알렉시스 오헤니언은 업계의 시각을 옹호한다. 미국이 감시국가의 길을 가게 되면, 첨단 IT 기업들이 모두 미국을 떠날 것이라는 것이 그의 경고다. 스노든의 폭로 행위를 도운 기자, 글렌 그린월드는 NSA에게 허용된 무소불위의 권한이 큰 해악을 끼치고 있으며, 실제로 테러 예방에는 거의 아무런 효과도 없다고 폭로한다.


NSA가 수집하는 정보는 안전하게 보관되고 있으며, 악용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헤이든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린월드는 일침을 날린다.


"정말 어떤 안전장치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헤이든 장군은 "정보를 잠금장치가 설치된 상자에 보관했다. 여러분의 모든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지만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답합니다. 하지만 수집한 정보를 남용하지 않는다는 정부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은 사례가 입증합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NSA는 에드워드 스노든이 수개월 동안 책상에 앉아 NSA의 가장 민감한 기록들을 모조리 다운로드했는데도 정작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감시국가>, 107쪽)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정권 당시 필리버스터로 막고자 했던 '테러방지법'을 지금 그냥 놔두고 있다. 앉은 자리가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 보인다고 했던가. 글렌 그린월드의 또 한마디를 들어보자.


테러는 감시 시스템의 진짜 원인이 아니라 핑계에 불과합니다. (중략) 미국은 자신이 원하는 거의 모든 일에 대한 핑계로 테러를 이용하고 있고, 대량 감시 체계에 대한 핑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감시국가>, 128쪽)


글렌 그린월드가 말하듯, 사적 영역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 인간이라 말할 수 없다. <1984>의 오세아니아도, 벤담의 판옵티콘도 '언제나' 감시를 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지 감시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것만으로 우리의 사적 영역은 그대로 소멸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수많은 내부고발자들이 자신들의 의로운 행위로 인해 오히려 몰락하는 것을 보아 왔다. 내부고발자들도 사람이고, 그래서 그들에게도 인간적 약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줄리안 어산지가 일탈 행위를 했다고 해서 그가 폭로한 미국 정부의 악행이 없었던 일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런데 에드워드 스노든에게는 그런 비난조차 할 수가 없다. 그는 의로운 일을 하기 위해 부귀영화를 포기했다. 러시아의 부패 정권에 망명했다는 세간의 비난은 사실을 왜곡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남미로 망명하려고 비행기를 탔고, 중간 기착지인 러시아에서 자신의 여권이 미국 정부에 의해 무효화되었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는 몇 주 동안 공항에서 <터미널>의 톰 행크스처럼 생활해야 했다. 프랑스에 망명하기를 원했으나 프랑스 정부는 미국의 보복이 두려워 그의 망명 신청을 거부했다. 도대체 그가 뭘 잘못한 걸까?


내부고발자들을 '관종'이라 폄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스노든은 심지어 유명해지는 것조차 바라지 않았다.


스노든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밤낮없이 출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노든은 꿈쩍하지 않았다. 방송국의 요청을 전달해도 거절했다. 대중의 주의가 폭로 내용에서 분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365쪽)


에드워드 스노든이 우리 시대 진정한 위인 목록에서 빠진다면, 역사는 우리 세대를 보고 코웃음을 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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