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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pr 27. 2021

빠져드는 캐릭터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회고하며

예전에 이름이 Crystal Clarity인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히피인 어머니 아버지 덕분에 나이가 든 다음에는 명함에 적기 힘든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자유로운 정신의 부모를 둔 것이 좋기만 한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런 일이 릴리라는 여자에게 일어났다. 아버지는 성공한 소설가, 어머니는 성공할 예술가다. 아버지의 성공으로 제법 큰 집을 소유한 그들은 아직 무명인 예술가들에게 거처와 작업공간을 제공한다. 꽃에는 꿀벌뿐 아니라 파리도 꼬이지 않는가. 쳇이라는 아주 이상한 이름을 가진 화가가 이 집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한다. 릴리의 어머니는 그의 천재성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아직은 무명이지만 언젠가 꽃을 피울 천재 화가라는 것이다.


릴리는 불안하다. 만나자마자부터 쳇이라는 중년 남자는 아직 어린 릴리에게 성적 호기심을 발산한다. 성추행을 당한 릴리는 그러나 부모님에게 상담조차 하지 못한다. 사실대로 말하면 자유분방한 어머니가 오히려 쳇과 섹스를 하라고 명령할 것 같아, 그녀는 두려워한다. 이래서야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아직 어린 그녀는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하기로 한다. 피터 스완슨의 소설,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 나오는 릴리라는 캐릭터다. 


미란다라는 여자도 있다. 남자라면 그녀를 처음 보고 다들 입을 헤 벌리고 만다. 이런 여자를 영화나 잡지가 아니라 현실에서 만나다니.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 편안한 삶을 살려는 생각 외에는 머리가 텅 빈 여자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단지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고 순수하기도 하다. 그녀는 바람을 피우는 동안에도 남편을 만나면 진정으로 반가워한다.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존재다. 고교 학창 시절. 그런 미란다가 파티에서 릴리를 만난다. 네 눈을 들여다봐도 돼? 그렇게 묻고 미란다는 릴리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녀의 푸른 눈을 한참 동안 쳐다본다. 수많은 색깔이 들어 있는, 고양이의 신비함을 간직한 눈이다. 예쁜 여자는 여자가 알아본다고 하지 않나.


릴리가 남자 눈에는 안 예쁘다는 말도 아니다. 그녀를 비행기에서 만난 남자는 그녀에게 심각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그녀와 결국 사랑에 빠져버린다. 변사 사건 참고인으로 그녀를 소환 조사한 경찰은 그녀에 관한 시를 끄적거리고, 이유도 없이 그녀를 미행하며 낭만적인 상상을 한다. 서두에 말했던 변태 화가도 아직 어린 그녀에게 푹 빠졌던 것 아닌가. 금발에 푸른 눈, 주근깨가 은하수처럼 뿌려진 얼굴, 투명한 피부. 이 정도로 이 캐릭터에 대한 외모 묘사는 넘어가도록 하자.


자, 이제 '죽여 마땅한 사람들'과 관련해서 릴리를 살펴보자.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직접 처리하거나, 남을 이용하여 처리하거나. 일반적인 여자라면 후자의 방법을 선호할 것이다. 하지만 릴리는 어떨까? 릴리의 특징을 한 가지 더 말하자면, 그녀는 독서광이다. 책과 함께하는 것이 그녀가 가장 선호하는 휴식 방법이다. 그녀는 남은 생을 책과 함께 살고 싶어 한다. 독서로 다져진 지적 능력을 그녀는 앞서 말한 두 가지 방법 어느 쪽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녀는 남을 조종할 수도 있고, 직접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남을 조종하는 것이 한 수 위의 방법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남자를 조종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신화적 존재들은 세이렌이나 양귀비처럼 대체로 머리를 덜 쓰는 존재들이다. 아니면 머리를 별로 안 써도 되는 상황이거나. 


그리스 비극에서도 마찬가지다. 남편 아가멤논을 죽일 때만 해도 남자를 조종해서 일을 처리했던 클라이태메스테라 역시, 아들 오레스테스의 진지한 복수를 상대할 때는 직접 해결하겠다고 도끼를 빼 들지 않았던가.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자를 홀리는 것은 미란다, 직접 해결하는 쪽은 릴리의 방식이다.


하지만 미란다와의 대결만은 다르다. 미란다도, 릴리도 남자를 조종하려 했다. 그러나 방식이 다르다. 미란다는 여태까지 해왔던 대로, 여성적 매력을 이용하여 브래드를 조종한다. 그러나 릴리는 논리를 가지고 그를 설득하려 한다. 승자가 누구였냐고? 직접 확인해 보기 바란다.


살인도 다른 모든 행위와 마찬가지로 반복할수록 쉬워지는 걸까?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여 대책을 세웠지만 쳇을 없애는 일은 어린 릴리에게 정말 버거웠다. 알러지를 이용해 자신을 가지고 논 남자 친구 에릭을 처치할 때는 마지막 순간, 그만둘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브래드를 처치하는 방법은 전문가의 숨결이 느껴진다. 킴볼을 칼로 찌를 때는 미안하다는 말까지 하는 여유를 보인다.


정상적인 독자라면 이 책에서 죽어 나간 사람들 전부가 정말로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개중에는 살인자도 있지만, 대개 훨씬 가벼운 범죄를 지른 사람들이다. 하지만 법이 아닌 도덕의 관점에서는 어떨까? 에릭의 죄는 양다리를 걸친 것이 아니라 세 치 혀를 놀려 그녀의 인생을 농락한 것이다. 어린 릴리에 대한 쳇의 행동은 정신적 살인이라고 할 만하다. 살면서 이런 사람들을 보게 되면 법적 정의와는 부합하지 않을지 몰라도,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벌을 주고 싶은 것은 사실이다.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의 살인 행각에 빠져드는 자신을 보며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다. 우리의 유전자가 릴리의 우월한 유전자를 탐내는 것뿐이다.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캐스팅을 원하는지에 대해 작가는 시원하게 대답을 했다. 마이클 패스벤더, 크리스 프랫, 제니퍼 로렌스, 에이미 애덤스, 조셉 고든 레빗. 우와 정말 보고 싶다. 또 허당 역을 맡게 되는 크리스 프랫이 불쌍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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