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김원영, <희망 대신 욕망>
장애인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안타깝게 좌절될 수밖에 없는 그들의 '희망'을 응원하는 대신, 그들이 인간으로서 당연한 욕망을 가질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다. 백번 맞는 말이다. 저자는 영화 <글래스>의 주인공 사뮤엘 잭슨처럼 '골형성 부전증'을 앓고 있다. 정말 고통스러운 장애이기는 해도, 정신은 온건하다. 절대로 알 수 없는 타인의 고통을 절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 나오는 다른 장애인들에 비해 볼 때, 그의 처지는 훨씬 나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평생 중증 아토피에 시달리며 살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걸 거의 꾀병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토피안 사이트에 들어가 보라. 중증 아토피안들은 자신들을 암 환자와 비교한다.)
분명하지는 않아도, 욕망과 희망은 구별할 수 있다. 어떤 어린이가 나중에 인공지능 전문가가 되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장래)희망이지만, 자산 1 천억 원을 일구겠다고 말한다면 그건 욕망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구별이 장애인에게는 달라진다. 침대형 휠체어에 누운 채 생활하는 장애인이 나중에 인공지능 전문가가 되겠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걸 욕망(욕심)이라 생각한다. 장애인이 가져도 좋을 희망은 그저 평범한 삶에 가깝게 사는 정도라고, 대개의 비장애인들은 막연히 생각한다. 장애인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네 주제에 남들 다 하는 대로 하고 살려고 욕심내지 마라'라는 말을 듣고 산다. 남들처럼 사는 것이 그들에게는 희망이 아니라 욕망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적에 당황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경험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날 휠체어를 탄 장애인 두 명과 시각장애인 한 명, 그리고 뇌성마비 장애인 한 명이 고깃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인은 이들을 보고 대뜸 이렇게 말했다 한다.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장애인들이 생물학적 손상을 극복할 수는 없다. 장애인들이 극복해야 하는 것은 손상된 몸에 부여된 '사회적 차별'이다. 그런데, 노인이 된다는 것은, 할 수 있던 것들을 할 수 없게 되는 지난하고 긴 과정이다. 사회적 기준에서 볼 때 장애와 다를 바가 없는 상태로 그들은 나아간다. 앞의 사례에 나온 고깃집 주인이 언젠가 노인이 되어 거동이 불편한 상태로 식당에 들어가다가 저런 질문을 받는다면, 그는 과연 저 순간을 떠올리게 될까?
"요즘 너무 살기 힘들다"라는 친구의 고백에 "꽃동네에 가서 장애인들을 보고 오면 힘이 날 것이다"라고 충고해주는 사람들은 명백히 누군가를 모욕하는 것이지만,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인간들을 만나 자기 존재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유혹이다. (241쪽)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는 것은 구구절절 옳은 말뿐이다. 그러나 불편함의 정도가 분명히 차이 나는 수많은 장애인들 중에 정신만은 또렷한 저자가 희망 대신 욕망을 추구하기에 더 나은 위치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같은 주장을 <잠수종과 나비>의 저자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789년의 혁명은 제3 계급 전원이 한 편에 서서 일으켰지만, 그 과실은 제3 계급에서 가장 형편이 나았던 사람들이 독점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