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
조지 오웰은 정말 재담가다. 단지 재미있기 때문에 그의 글을 읽다가 그의 사상에 물드는 사람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 문단을 보자.
민간인 살해는 옳지 않은 짓이지만 고성능 폭약 수천 톤을 주거 지역에 떨어뜨리는 건 옳은 일로 치부하는 세상이다.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든다. 지구가 사실은 다른 행성에서 빌려쓰고 있는 정신병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말이다. (178쪽)
그는 폭격기의 등장을 환영한다고 말한다. 예전의 왕과 귀족들은 다른 사람들만을 사지로 내몰면서 자신들에게는 안전한 전쟁을 벌였지만, 이제는 폭격기가 나타나 그들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뜨린다. 전쟁이 조금은 더 공정해진 것이다. 그가 단지 재담가에 그치지 않고 뛰어난 현실감각을 겸비한 전략적 사고의 주인이라는 점은, 그의 예측 능력만 봐도 알 수 있다. 1945년 2월에 쓴 글에서, 오웰은 독일이 '올해 안에 패전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삶의 좀더 소박한 부분에서도 오웰의 통찰은 빛을 발한다.
전쟁 전에는 형편이 되는 한 사치를 부리는 게 당연했다. 늘 누군가가 무언가를 내놓고 팔았다. 성공한 사람의 이미지는 무언가를 많이 팔아 돈을 많이 번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대중은 깨달은 듯하다. 돈은 그 자체로서 무의미하며 오직 물건만이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단출한 삶을 사는 법을 배워야 했고, (중략) 이런 변화의 압박 아래서 우리는 더 소박한 즐거움을 재발견하는 중이다. 독서와 걷기, 정원 가꾸기, 수영, 춤, 노래... 전쟁 전 풍요로운 시대에는 우리가 반쯤 잊고 살았던 것들이다. (166쪽)
그의 위대함은 단지 글솜씨에 있지 않다. 그는 인류 전체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흑인들이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고, 인도 의회는 영국 노동당 대신 자국 자본가들의 편을 드는 상황을 그는 개탄한다. 훨씬 더 국소적인 이기주의로 인해, 사회주의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는 발도 붙이지 못했다고 그는 덧붙인다.
오웰의 숙적은 전체주의다. 전체주의가 위험한 단 한 가지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오웰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전체주의가 정말로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잔혹행위를 저지르기 때문이 아니다. 전체주의는 객관적 사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과거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도 통제하려 든다. (112쪽)
그는 영국이 독일에 승리해야 하는 이유로, 영국이 독일보다 거짓말을 덜 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나아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으로, '대중의 평균적인 정치 이해도를 높이는 일'(126쪽)을 들고 있다. 70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에도 딱 맞는 진단이다. 정치는 필요악이다.
악이라고 해서 그걸 멀리하면 일본과 같은 정치 지옥이 나타난다. 정치 혐오에 매몰된 유권자들은 투표를 하지 않으며, 집권 세력은 무슨 짓을 해도 그에 대해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총리가 자기 형한테 골판지 침대를 발주해도, 원전 오염수를 방류해도, 코로나 확산일로에 올림픽 개최를 강행해도 말이다.
지금 지구촌 대부분의 나라에서 정치는 극단적인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맞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오웰의 말대로 대중의 평균적인 정치 이해도가 극히 낮기 때문이다. 트럼프 같은 자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의 저자가 지적하듯 정치에서 소외된 많은 사람들을 그가 대변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정치 이슈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직설적이고 도발적인 트럼프의 증오 정치에 환호했다. 오웰 시대의 영국인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얼마나 유사하게 낮은 수준의 정치 이해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다음 문단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진짜 파시스트 동조자 몇 명을 제외한다면 영국인 대부분이 파시스트와 같은 말로 '양아치'를 꼽을 것이다. 차라리 이 의미가 변질된 '파시스트'라는 단어의 현재 정의에 더 가깝다. 뿐만 아니라 파시즘은 정치적 제도이자 경제적 제도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파시즘을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걸까? 파시즘을 제대로 정의 내리기에 우리는 역부족이다. (144쪽)
파시즘을 정의 내리기에 우리가 역부족인 이유는 다름 아닌 정치 이해도의 부족에 있다. 정치 이해도 부족이란 말보다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라 말하는 것이 옳아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공부를 못하기에 앞서 아예 하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혐오하는 대상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대상을 비하적인 명칭으로 부르면서 멀리할 뿐이다. 그래서 어떤 비하적인 명칭이 유행하면 그 명칭이 우리가 혐오하는 대상들을 전부 포괄하게 된다. 오웰 시대에 양아치를 파시스트라 불렀듯이, 우리는 혐오하는 대상을 극우꼴통이나 좌빨이라 부른다.
그러나 오웰의 통찰에 동조하는 나는 얼마나 다르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오웰도 처음부터 자기반성과 통찰에 넘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고백하는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버마행 여객선에 탑승한 젊은 시절 오웰의 이야기다. 호화로운 식사와 음료가 가득한 여객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개 인도인이었다. 어느날 점심을 먹고 갑판 위로 나온 오웰의 눈에 한 조타수가 눈에 띄었다. 생쥐처럼 후다닥 뛰어가는 그의 손에는 먹다 남은 푸딩이 들려 있었다. 승객이 먹다 남긴 푸딩을 자기 방에 가져가 마음 편히 먹어보려다가, 급히 대처할 일이 생겨 갑판 위로 뛰어나온 것이다.
고도로 숙련된 장인인 조타수의 손에 말 그대로 승객 모두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그런 사람이 승객이 남긴 음식을 훔치고 기뻐하고 있었다. 독자들은 내가 과장하는 거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주어진 역할과 그에 따른 대가 사이에 이렇게 큰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내가 사회주의 팸플릿 한 뭉치에서 배운 것보다 더 큰 교훈을 남겼다. (275쪽)
그 조타수에게는 그가 맡은 중차대한 역할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보수가 지급되고 있었다. 먹다 남은 푸딩을 훔치는 일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얼개라면, 그 불공정성에 대해 적어도 한번쯤은 분노해야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그 불공정한 사회 구조에서 남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물어뜯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일제시대는 그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역사가 어떻게 평가할지, 우리도 걱정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