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공감의 위험성에 관한 대단히 체계적인 논문이다. 단점은 막연하고 우회적인 사고가 글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으로, 이 때문에 글이 필요 이상으로 늘어지고, 독자는 종종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느낌을 받게 된다. 장점은 처음부터 주제와 결론을 제시하고 시작한다는 점이다. 사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 책의 논지를 따라가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공감하는 법을 가르쳐야 할까? 황당한 질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공감은 위험할 수 있다. 아니, 위험하다. 공감이 위험한 이유는 다음 다섯 가지 때문이다.
1. 공감은 자아 상실로 이어진다. 니체의 초인은 타인에게 무관심하다.
2. 공감은 흑백논리로 적과 아군을 만든다. 공감은 적대상황을 악화시킨다.
3. 공감하는 사람은 희생자가 아닌 구원자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에 따라 희생자는 공감으로 인해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4. 공감은 잔인한 상황을 유발하기도 한다. 사디스트에게는 상대방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5. 다른 사람을 수단 삼아 자신의 경험을 넓히려는 '흡혈귀 행위'의 출발점 역시 공감이다. '헬리콥터 부모'가 이런 사례의 전형이다.
공감이 범죄행위로 발전하는 사디즘은 끔찍한 것이지만, 그 이유로 공감을 배척하는 것은 본말전도다. 사디즘은 '흡혈귀 행위'와 마찬가지로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이며, 사회적으로 큰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공감을 배척하고 초인이 되려는 사람은 많지도 않을 것이고, 그들은 우리의 배려를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굳이 그들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공감이 가장 문제되는 경우는 적대상황을 악화시키는 공감의 본질(2번), 그리고 공감으로 인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오히려 도움에서 배제되는 상황(3번)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선 공감의 이분법적 경향을 따져 보자. 인간은 허공에 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을 지지해줄 어떤 레퍼런스가 필요하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고, 공감하고, 그 과정에서 좋은 편과 나쁜 편을 구분짓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공감이 흑백논리와 적대감정의 에스컬레이션을 불러오는 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다. 다만, 책에도 나오듯이 아이들에게 공감교육을 하는 것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책에는 북아일랜드에서 실시되었된 다종교 교육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종교간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역사 교사들은 6~8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상대방의 종교를 이해하도록 하는 교과 내용을 개발했다. 그러나 교육 결과는 처참했다. 학생들은 역사적 맥락에서 상대 종교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를 이해했지만, 그것을 악으로 해석했다. 그들은 자기 종교에 대해 더 강한 공감과 소속감을 드러냈다. 공감이 적대상황을 악화시킨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결국 폐기되었다고 한다.
책에는 적대상황을 성공적으로 소멸시킨 두 개의 훌륭한 사례가 소개된다. 첫째는 노예해방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선악이 분명했다. 노예상인이나 노예농장주와 공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따라서 이 경우에는 적대하는 두'진영'이 성립할 여지가 없었으며, 그래서 성공한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남아공의 만델라 정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범죄자들을 색출하는 과정과는 달리, 만델라 정부는 관용을 정책으로 사용했다. 아파르트헤이트 범죄를 자백하는 사람들을 전원 사면했다. 이로서 범죄자와 피해자라는 두 개의 진영이 발생하는 대신, 남아공 사람들은 융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논평한다.
편들기와 공감을 차단했기 때문에 갈등도 계속 제거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0쪽)
공감이 인도주의에 역행하는 현상도 사실은 공감의 이분법적 본질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상황은 공감하는 사람이 희생자가 아닌 구원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상황이다. 이 우월한 감정을 유지하려면 희생자는 희생 상태에 그대로 있어야 하며, 공감자와 분리되어야 한다. 서구유럽 사람들이 몇 푼 안되는 자선기금을 내놓으며 자신이 최빈국 문제에 기여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현상이 이런 상황의 전형이다. 이에 대해서는 앵거스 디튼이 <대탈주>에서 아주 명쾌하게 다루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공감을 표출하는 사람들은 자기 만족에 관심이 있을 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상황 개선에는 별 관심이 없다. 앵거스 디튼의 말대로 그저 자기 양심의 만족감을 위해 돈을 내놓는 것이며, 그 돈이 자신의 손을 떠나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
이 책의 논리에 따르면, 자신의 도움으로 인해 희생자가 희생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면 공감자는 만족감을 얻을 다른 대상을 찾아야 한다. 물론 이런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요는 이런 류의 공감이 언제나 희생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 그리고 공감자는 공감 상황에서 결코 희생자와 같은 편에 서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이 문제가 도덕적 차원 이상의 문제가 되는 이유는, 현재 활동 중인 대개의 사회단체가 바로 이런 방식의 공감에 기대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앵거스 디튼의 지적대로, 현 상태의 ODA는 개발원조를 시행하는 단체들의 운영자들에게나 도움이 된다. 더 나쁜 것은, 개발원조가 독재를 고착시킨다는 점이다. 앵거스 디튼의 설명은 이렇다. 최빈국 정부에 뿌려지는 개발원조는 독재자가 시민들을 무시할 수 있게 만든다. 시민들의 세금에 기대는 대신 개발원조금에 기대 정권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관점에서 이 그림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명이 된다. 공감은 희생자를 필요로 하는데, 희생자가 존재하려면 그들을 희생시키는 존재, 즉 악당이 필요하다. 그러니 공감자가 공감 유희를 계속하여 향유하려면 악당 역할을 할 독재자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앵거스 디튼과 이 책의 저자는 분명 다른 논거를 말하고 있지만, 결론은 같다. 싸구려 동정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희생자를 영원히 희생 상태에 가두는 것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문제에 대해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고, 나아가 행동해야 한다. 테레사 수녀도 눈앞의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진실한 공감은 그런 것이다. 누구도 '기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소년'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을 동정할 수는 없다. 인간의 상상력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굶는 소년을 도울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추상 수준에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런 차원에서 보더라도, 역시 공감은 필요하다. 우리는 사고의 결론보다 흔들리는 심장에 더 진실하게 반응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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