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 마시며 해본 잡생각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수업이 즉각 도입되었고, (나는 아니지만) 재택근무가 확산되었으며, 보편적 복지에 상당히 가까운 돈 뿌리기가 잠깐이나마 실시되었다. 이로 인해 새로운 세상이 가속될 것인가? 몇 가지 주제에 한정하여 생각해봤다.
1. 기본소득제와 민주주의
기본소득제가 실시되는 방법이라면 두 가지가 있다. 1) 사람에게 거둔 세금으로 뿌린다. 2) 자본에서 거둔 세금으로 뿌린다. 많은 미래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것이 로봇에 대한 세금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두 번째 방법이다. (물론 토마 피케티식의 자산세도 상상의 영역에서는 가능하다. 실제로는 어림도 없겠지만.) 그렇다면 로봇에 의한 생산은 어디까지 왔는가? 인공지능을 수반한 자동화에 의해 대체될 직업군 1순위는 바로 물류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우 물류가 GDP의 11%를 차지한다. 2014년 통계이므로, 코로나 및 온라인 상업 활성화로 이 비중은 더 커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기본소득제에 관한 논의는 복지 분야 최선도 국가들에서도 논란이 많은 문제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진국 사례가 충분히 쌓인 다음에나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마스터 알고리즘>에서 페드로 도밍고스는 자동화로 인해 실업률이 50%를 찍고 나면 기본소득이 급히 도입될 것이라 전망한다. 다수결 원칙을 충실하게 반영한 추론이지만, 과연 민주주의라는 것이 제대로 작동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나는 강신주처럼 현재의 대의제가 민주주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직접 민주주의를 실제로 시행하는 스위스 같은 나라가 존재하고, 블록체인 기술로 안전한 전자투표가 가능한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거의 모든 나라들이 대의제를 고수한다. 그들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전쟁(폭력)의 대가가 예산선의 완전한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요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미얀마의 현재 상황이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나치가 패망한 지 반세기가 넘게 지났지만, 인간은 여전히 남의 일에 냉담하다. 결국 대의제라는 게임은 그 게임을 현재 진행 중인 이들에 의해 앞으로도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다. 가짜 민주주의 시스템이 유지되는 한, 단순 다수결조차 조작되는 현실 역시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대로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인간의 값싼 본성은 다른 측면도 가지고 있다. 코로나 사태에서 각국 정부가 뿌려댄 헬리콥터 머니 말이다. 최고 권력자의 임기가 정해져 있는 한, 임기 이후의 일에 대해서 아무 생각 없이 단기적인 정책을 남발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짧은 임기는 또한 책임 있는 결정을 회피하게 한다.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종부세를 두 차례의 우파 정권이 그냥 놔둔 것이나, 야당 시절에 필리버스터까지 해가며 막으려던 테러방지법을 그냥 방치 중인 현 여당의 행동을 보라.
간단히 말해, 기본소득제의 도입은 대의제의 본질 상 정상적인 경로, 즉 민주적 절차에 의해 도입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 그러나 임기제라는 또 다른 현대 정치의 측면 때문에 갑작스럽게 도입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후임 정권들은 기본소득제를 폐기하는 모험을 강행하지 않을 것이다. 흑사병이라는 우연적 요소가 임금 상승과 기술 발전을 가져왔듯이, 역사는 또다시 우연에 기대 이 미묘한 시기를 강행 돌파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2. 서비스의 온라인화
교육, 미팅, 공연 등 기존 서비스 산업이 온라인으로 대체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아직은 실험적인 수준이다. 네이버에서 각종 공연을 온라인으로 기획하고 있지만, 단돈 만 원에 조성진 콘서트를 볼 수 있음에도 나는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다. 머룬 5 한국 공연 티켓이 30만 원이나 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자우림의 공연 영상을 보는 것과 그들의 공연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다. 겨우 만 원이라고는 하지만, 그 돈을 내고 내 컴퓨터에서 나오는 영상과 음악을 보고 듣는 것은, 3년 전 핀란드에서 그의 연주를 직접 들었던 경험과는 정말 비교도 할 수 없이 초라한 경험일 것이다. 몇 년 전에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말석에서 보았다. 배우들이 너무 작게 보였던 것이 아쉬워 유튜브를 검색하니 공연 영상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그러나 몇 분도 보지 못하고 꺼버렸다. 현장의 경험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 분야에서는 일단 온라인 교육이 좋아 보인다. 이미 EBS가 이 분야에서 강자로 자리하고 있고, 대형 학원에서는 화면으로 강의를 듣는 학생들도 많다. 옆 교실에서 강의를 들으나, 온라인으로 들으나 차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졸지만 않는다면, 현장 강의보다 더 효과가 좋지 않을까? 녹화 영상 강의라면 중간에 멈출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미팅이라면, 캐나다 시절에 무려 전용선으로 하는 미팅을 해본 적이 있다. 과연 화질도 좋고 끊김도 전혀 없었지만, 직접 만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간단히 말해, 아주 딱딱하고 어색했다. 실제로 미국 본사에 출장 갔을 때는 비슷한 주제로 훨씬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온라인 교육은 전망이 좋으나 미팅(MICE)과 공연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된다. MICE의 경우, 예컨대 박람회는 미팅보다도 온라인 전환이 어렵다. 시연 경험도 제약되기 때문이다. 공연의 경우는 본질적인 체험의 격차가 너무 커서, 온라인으로 대체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료 영상 서비스는 가능할 것이지만, 실제 공연과 같은 수준의 가격표는 절대로 붙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3. 복지의 미래, 그리고 부양비
2019년 기준, 우리나라의 노년 부양비는 약 5 대 1 정도다. 일하는 연령대 6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30년 뒤에는 3 대 2 정도가 된다. (예측치는 네이버 시사상식사전에서 가져왔다.) 일하는 연령대 3인이 노인 두 명을 부양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전체 부양비, 즉 일하는 연령대 대비 노인과 어린이의 합으로 하면, 거의 1 대 1이 된다. 인구 둘 중 한 명이 자신과 다른 한 명을 부양한다는 말이다. 출생률 저하의 진짜 문제점은 당장의 경제 성장률 하락이 아니라,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이런 복지 시스템이 과연 지속 가능할까?
물론 위 통계 예측치는 인구 추세를 단순 시계열 분석으로 예측한 것이고, 기술 발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는 일하는 사람 한 명과 일하는 로봇 10기가 한 명을 부양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로봇 '1기'라고 정의하는 문제가 또 남기는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소위 4차 산업혁명의 진행 속도가 언론의 호들갑에 비해 너무 느리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2018년이면 상용화될 거라던 자율주행 차량은 아직도 상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법과 제도의 문제라는 주장도 설득력은 떨어진다. 자율주행의 문제는 단순히 도로 위의 차선을 진하게 그리는 문제가 아니다. 충돌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 책임을 누구에게 지울 것인가, 앞에 보이는 5명의 행인을 피해 핸들을 돌려 길가의 1명을 죽일 것인가 하는 심각한 윤리 딜레마를 포함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술 외적인 측면에서 심각한 딜레마를 안고 있는 미래기술은 자율주행뿐이 아니다. 살상 무기의 위험이 이미 드러난 3D 프린팅, 이미 살상용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드론, 윤리적 딜레마로 인해 기술 발전이 실제로 저해받는 유전자 조작 등 거의 모든 미래기술이 이 딜레마를 안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예방적 복지비 지출이, 사태가 터지고 난 다음에 수습하는 비용보다 싸다는 것이다. 아니면 인류는 도덕의 다음 단계로 이행할지도 모르겠다. <카이지>에 나오는 리네카와의 말을 실천하는 것이다. "돈은 목숨보다 귀하다." 이런 도덕률이 구현된 미래사회를 그리는 공상과학 소설도 많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부분은 일단 접어두자.
기술 수준과 사회적 합의를 현재대로 유지하는 가정 하에서, 코로나 이후의 세계는 현재의 복지 체계로 감당할 수 없다. 복지 체계를 고도화시키고, 그 비용을 어떻게 마련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기술 수준으로 어느 정도 그 비용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 등 낙관론자들은 그 비용이 오히려 내려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그런 미래는 의외로 조금 멀리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남은 열쇠는 사회적 합의다. 코로나 사태의 교훈이, 무한 성장주의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극복하고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 합의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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