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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과 나무

알고리즘, 알고리듬

세상 도처에 널려 있는 언어 천재들

by 히말


algorithm은 보통 알고리즘으로 번역한다. 오래 전 누군가가 그렇게 번역해서 그렇다. 요즘 이 단어를 알고리듬이라고 번역하는 책들을 종종 만난다. 다른 번역가들은 저 단어의 발음이 그렇다는 걸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브라우닝의 시에 등장하는 '돼먹지 못한 소리를 들으면 밥을 먹다가도 식탁 위로 뛰어올라 분개하는' 수도사 같은 사람들인가.


알고리즘이란 단어의 어원은 페르시아의 대수학자 알 콰리즈미다. 그가 쓴 책이 서양으로 건너와 대수학(algebra)이라는 단어를 만들기도 했다. 페르시아어는 모르지만 이 사람 이름의 영문 철자가 Khwarizmi인 걸 보면 'z' 발음이 없던 나라로 넘어 오면서 'th'로 변형된 듯하다. 말하자면 알고리즘이란 번역은 오히려 어원에 충실한 번역이라 볼 수 있다.


오래된 번역이 훌륭한 사례는 많다.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 아니라 <암굴왕>이며, <패러다이스 로스트>가 아니라 <실락원>이다. 서양 문물이 도입되던 초기에는 당연하게도 외국어를 번역할 사람이 부족했다. 그래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번역을 하다보니 이런 예술적인 번역이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암굴왕>이라는 제목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안타깝다.) 이들 책이 요즘 들어왔더라면 다들 원제목을 그냥 한글로 쓴 제목이 붙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견종인 말티즈 역시 원래 발음대로 하자면 몰티즈가 맞다. 그러나 나는 이 강아지를 볼 때마다 저절로 "말티즈!"라고 외친다. 내가 이 강아지를 처음 봤을 때 그렇게 들었기 때문이다. 스펠링을 알고 나서는 몰티즈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잘 되지가 않는다. 왠지 어색하다.


9125eed72d070e9c0fcdd4445c4d330f.jpg 경태는 말티즈다


우리 주변에 정착해 살아가는 틀린 발음은 엄청 흔하다. 헐리웃에 가서 '제임스 맥어보이'나 '제이슨 스타뎀'을 찾아봐야 아마 찾지 못할 것이다. 본인들이 그 이름을 알아듣지 못할 테니 말이다. 몇 년 전 노벨 경제학상을 탔던 교수의 이름이 쎄일러냐 탈러냐를 놓고 온라인 상에서 설전이 벌어진 적도 있다. 정작 본인은 어떻게 불러도 상관 없다는 입장이었다.


언젠가 누군가는 이런 불일치를 시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과정을 개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다. 언어는 생물이다. 어떤 문법 규칙이나 발음을 강요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만 성공할 따름이다. 격렬한 산화현상을 정확하게 지칭하기 위해 세종대왕이 도입했던 비읍순경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초가 삼간이 다 타는데 '블(이 비읍은 비읍순경음이다)이야~'라고 정확하게 외치기가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손에 잡히는 경제>에 나왔던 어떤 사람이 떠오른다. 그는 WTO를 '우토'라고 발음해야 한다면서 무식한 미국인들이 '더블유티오'라는 잘못된 발음에 집착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진행자가 만류하려고 했는데도 끝내 울부짖은 걸 보면, 미국인들이 영어 단어를 틀리게 발음하는 사실에 꽤 격분했던 것 같다. 이런 언어 천재가 공중파에 나오는 것은 국격에 좀 심각한 문제 아닐까 생각해본다. 비슷하게 성마른 (그리고 한국말도 잘 하는) 미국인이 이 방송을 듣기라도 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하면 재미있다.


영어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참견을 좀 하자면, w는 단독으로 절대 발음될 수 없는 음소다. 아세안 국가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ARF(아세안지역포럼)를 스펠링 그대로 읽어 개 짖는 소리를 내는 게 미국인들이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아시아 국가 사람들은 그렇게 발음하지 않았다.) WTO를 더 쉽게 읽을 수 있었다면 당연히 애초부터 그렇게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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