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강신주, <철학 vs 철학> (2)
설계자와 설계도
기독교가 세상을 접수하는 바람에, 서양철학사에는 아주 중요한 논쟁이 등장하게 된다. 바로 설계도에 관한 것이다. 유일신이 설계도에 따라 세상을 창조했다면, 그 유일신은 설계도를 거스르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플라톤과 아퀴나스는 유일신이라 하더라도 설계도에는 거스를 수 없다고 생각했고, 흄이나 칸트는 설계도야말로 제작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므로 그런 불일치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들은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설계도가 제작자가 아닌 '재료'에 따른다고 본 입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스피노자, 니체, 마르크스가 그런 입장을 지지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기독교가 절대적 지위에서 밀려난 이후에 나타난 사람들이다. 니체의 말대로 신이 죽은 다음에나 가능한 주장이었다.
회귀자 루크레티우스
니체로부터 거의 2천 년 전, 고대 철학의 전통에서 우리는 루크레티우스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우주는 원자들의 우연한 마주침에서 기원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자신들이 가진 무게라는 속성 때문에 원자들이 허공을 관통해 아래로 떨어질 때, 절대적으로 예견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들에서 그것들은 자신들의 직선 경로로부터 아주 조금, 단지 한순간의 위치 이동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작은 정도로, 틀어진다. 만일 그것들이 직선 경로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모든 원자들은 빗방울처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을 관통하여 아래로 떨어지게 될 것이며, 일차적 성분들 사이에 어떤 충돌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며, 어떤 타격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자연은 결코 어떤 것도 만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강신주 86쪽에서 재인용)
현대 우주론을 보는 느낌이다. 물질과 반물질 사이의 미묘한 균형의 깨짐이 없었다면, 빅뱅 이후 세계는 없었다. 루크레티우스가 말하는 미세한 비껴 내림, 즉 '클리나멘(Clinamen)'은 바로 그 미묘한 불균형, 즉 우주 배경 복사에 흔적이 남아 있는 바로 그 불균형을 말하는 듯하다. 이러한 빗나감은 오직 사후에만 결정된다는 것이 또한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이다. 그는 우리가 사태를 관찰하고 나서야 그 현상을 설명할 뿐이며, 사전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루크레티우스는 간단한 추론을 통해 우주 또는 인류의 역사가 길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로마 시대에 살았으면서 세상만사에 관해 대단히 현대적인 관점을 가졌던 루크레티우스는 설마 회귀자였던 것은 아닐까? ^^;;
명백히 반 기독교적인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이 분서갱유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그가 <아에네이드>의 베르길리우스와 로마 문학을 양분하는 대문호였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가 아니었다면 데모크리토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유수한 철학자들의 생각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뉴턴 물리학이 기독교계의 공격을 받지 않았던 이유는 뉴턴 자신이 매우 열정적인 신학자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빈치적인' 문무 겸장의 천재들은 이런 묘한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설계된 것이라면 타자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강신주에 따르면 의미의 사전성 또는 사후성은 결국 타자의 문제다. 의미가 사후적으로만 결정된다고 생각해야 우리는 타자를 긍정할 수 있다. 만약 의미가 사전적으로 결정된다면, 내가 관찰하는 세계에 자유의지란 없다. 그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에게 자유의지를 억지로 부여한다 해도, 그것은 거기에서 끝난다. 세계는 사전적으로 결정된 것이며, 그것을 주도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나뿐이다.
본질에 관한 논쟁도, 설계도와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도 결국 인식론으로 귀결된다. 버클리는 아무도 관찰하지 않는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를 '신'이라는 관찰자의 존재로 귀결시켰다. 들뢰즈는 그것을 '타자'라는 이름으로 긍정했다.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을 확장하면, 우리는 유아론에 갇힌 채로도 어쩌면 세상을 관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세계에 우리는 혼자뿐이다. 타자의 문제는 결국 본질의 문제다.
노자의 숙적은 장자?
흔히 노장사상이란 이름으로 묶이는 노자와 장자를, 강신주는 상당히 대조적으로 구별한다.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라 말한 노자는 본질을 지지하는 입장이고, 사물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기 때문에 그렇게 구분된다고 말한 장자는 본질을 부정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을 도식화하고, 적절한 좌표에 욱여넣어 즉문즉답이 가능케 하는 강신주 철학은 그 나름대로 분명 강점이 있다. 그러나 도식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양태를 무시하기에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노자는 '명가명 비상명'이라 말했다. 어떤 이름은 그 이름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유명한 이 문구의 해석에 논쟁이 있다는 사실은 잠시 접어두고, 나는 내 해석대로 가겠다.) <도덕경> 제1장에서 이렇게 말한 노자가 '불변의 본질'을 고수했다는 강신주의 주장을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