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강신주, <철학 vs 철학> (3)
실재라는 이름의 미궁
현대 이전의 철학에서는 우리의 직관이나 경험을 넘어서는 실재가 존재하는가가 쟁점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 실재가 존재한다는 입장이 실재론으로 불렸다. 플라톤의 이데아나 칸트의 물자체가 바로 그런 실재다. 즉 실재란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고매한 존재이자, 불변의 본질적인 어떤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철학자들은 경험과 감각을 중시했다. 에피쿠로스나 니체가 그런 사람들이다.
반면, 과학혁명 이후의 현대 철학에서 실재론이란 관념을 넘어서는 실재를 주장한다. 우리의 눈은 바이러스를 감각하지 못하지만 바이러스는 존재한다. 이를 지지하는 것이 실재론의 입장이다. 이와 배치되는 주장은 우리의 감각으로 구성하지 못하는 차원의 실재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버클리의 관념론이 대표적으로 이런 입장이며, 구체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없으나 끝없이 철학자를 괴롭히는 유아론 역시 이런 입장이다. 후설은 바로 이 관념론을 깨뜨리기 위해 현상학을 도입했다.
눈이 나쁜 사람을 가정해 보자. 안경을 쓰고 바라본 세상과 맨눈으로 바라본 세상 중 어느 것이 실재일까? 칸트는 둘 다 실재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물자체를 감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니체는 둘 다 실재라고 긍정할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긍정한다. 따라서 안경을 쓰고 약한 시력을 극복한 상태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더 높게 평가할 것이다. 강신주의 강점은 바로 이런 실제 사례에 철학자들의 생각을 대입하는 점이다.
불교철학도 인식론을 두고 싸웠다
어떻게 실재를 파악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인식론이다. 플라톤 이래 모든 철학자들이 이 문제에 도전했다고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교철학에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대단히 치열하고 매우 깊이 있는 논쟁이 오래전에 벌어졌다. 세세히 가르면 수백 개의 분파로 나뉠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강신주는 불교적 인식론을 단 네 개의 학파로 구분한다.
설일체유부는 외부 대상이 실재하며, 직접적으로 우리의 감각 대상이 된다고 말한다. 경량부는 외부 대상이 순간적으로 소멸(찰나멸)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감각되지 못하고 오직 추론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둘이 소승불교의 입장이다.
유식학파는 외부 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의식만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중관학파는 외부 대상뿐 아니라 의식조차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 둘이 대승불교에 해당한다.
정리하면, 설일체유부는 현대 과학에 가장 가까운, 그러니까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장 상식적인 입장이다. 경량부는 실재를 인정하되 이것이 찰나에 존재할 뿐이므로 우리가 실재를 감각하는 대신 추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단히 독특한 입장인데, 강신주는 경량부에 가까운 것이 칸트나 후설의 철학이라 말한다.
유사한 측면이 분명 있으나, 칸트나 후설이 경량부의 입장에 대응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후설은 인식론의 방법론을 추구했을 뿐, 그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았다. 물자체는 인간의 어떤 인식도 벗어난다고 칸트는 말한다. 수학적 추론이 종합 명제라는 그의 주장은 얼토당토않으니 고려하지 않겠다.
유식학파의 입장은 버클리 철학과 거의 같다. 강신주는 중관학파를 니체와 연결 짓고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중관학파의 입장은 니힐리즘이란 이름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지 않은가.
명나라의 현상학자
인식론의 예리함에 있어 후설의 현상학에 맞설 만한 것은 없다. 후설은 말하자면 철학의 내용이 아니라 철학의 방법을 제시한 것인데, 이에 대해 강신주는 후설이 '철학 대신 철학하기'를 가르쳤다고 말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를 위시한 후설의 제자들은 후설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후설의 에포케, 즉 판단 중지를 강신주는 하나의 판단이라 말한다. 내가 검증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판단을 모두 거부하고 나 자신의 방법으로 세계를 인식하겠다는 결단이야말로 가장 중대한 판단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동양에는 이미 후설적인 사고를 개진한 철학자가 존재했는데, 그가 바로 왕수인이다. 그의 호는 양명이다. 즉 양명학의 창시자가 왕수인이다. 왕수인은 어떤 존재가 나의 인식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거부했다. '꽃은 나와 무관하게 피고 진다"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왕수인은 말할 것이다. "이미 그대의 마음이 그 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네." 바로 이런 마음의 지향성이야말로 현상학의 핵심인데, 이를 왕수인은 후설보다 400년이나 전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향성들이 없이는 객관적인 세계가 우리에게 현존하지 않는다. 객관들은 의미와 존재양상을 지닌 채로만 우리에 대해 존재한다. 이러한 의미와 존재양상에 있어서 객관들은 항상 주관적 작업으로부터 발생하고 있거나 혹은 발생해 있는 것이다." (에드문트 후설,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강신주의 책 523쪽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