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조귀동, <세습 중산층 사회>
문제의 핵심
몇 년간 논란이 됐던 '20대 개새끼론'은 이제 옛말이 되었지만 20대가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를 지칭하는 '20대 보수화'라는 키워드를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조국, 인국공, 그리고 LH 사태를 지나면서 우리 사회의 핵심 담론 중 하나는 분명 '공정'이라는 단어를 맴돌고 있다.
현재의 20대가 직면하는 불공정한 상황을 통계로 설명하는 이 책의 도입부는 진부하기 이를 데가 없다. 학력, 학벌, 그리고 인서울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수치를 나열하는 부분은 지루하기 그지 없다. 그래프가 필요한 곳에 숫자가 빼곡한 표를 배치하고, 그래프가 정작 나올 때는 어딘가 포커스가 맞지 않는다. 그렇게 지루하게 숫자를 들이대며 객관성을 담보했다고 생각한 책은 후반부에 들어 갑자기 통찰력을 내뿜는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이미 제목에 나와 있다. 문제는 586이라는 특정한 인구 집단이 아니다. 세계 각국에서 기회의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데 성공한 세습 중산층이라는 것이 드디어 한국에도 등장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20대 남성, 공통의 적을 만들다
20대가 보수화되었다 내지는 특히 20대 남성이 보수 정당을 지지한다는 식의 명제는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만든다. 현재 50대인 사람들을 전부 586이라 부를 수 없듯이, 20대라고 해서 어떤 균질의 혼합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했으며, 하나는 거의 절대 건널 수 없고, 다른 하나는 이론상 건널 수 있지만 실상은 역시 마찬가지로 거의 건너지 못하는 두 개의 간극을 고려해야 한다. 바로 성별과 빈부 격차다. 이 두 개의 기준을 적용하면, 20대는 4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부유한 20대 남성이야말로 '20대 보수화'라는 담론이 지칭하는 바로 그 집단이다. 이들은 586 부모의 전폭적 지원 하에 좋은 일자리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인간 본성이 원래 그런 것이라서, 이들은 자신의 성공을 스스로의 노력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들이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반면 가난한 20대 남성은 극복할 수 없는 계급 간극을 직면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타자화할 수 있는 대상이 있으니, 역사상 언제나 약자에 자리해온 여성이라는 집단이 그것이다. 통계가 보여주듯, 이 집단의 구성원 중 상당수는 평생 미혼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들에게 여성은 가족조차 되지 못하는 철저한 타자다. 성평등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는 것이 이 집단인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부유한 20대 남성이라고 해서 성평등 담론에 호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전 세대에 비해 여성 동료들과 더 힘겨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 게다가 여성에 유리한 사회 정책이 자신들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다르지만 이들 역시 가난한 20대 남성과 마찬가지로 성평등 담론에 대해 적대적이다.
<시사IN>이 한국리서치와 함께 2019년 3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법 집행이 남성에게 불리하다'고 답한 응답이 20대 남성은 53.6%로 전체 남성 평균인 26.7%보다 두 배 이상 높다. 또 이들은 '한국에서 결혼은 여성에게 유리하다'는 질문에 대해 66.3%가 '그렇다'고 답하는 등 '결혼시장과 같은 사회문화적 권력 관계에서도 남자가 약자'라고 생각한다. (279쪽)
뭐 이런 찐따들이 다 있나 한심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을 하나하나 직접 면담한다고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스위스에서 일할 당시 만났던 현지인 남자 직원이 생각난다. 그는 번듯한 외모에 매우 예의바르고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함께 식사를 하던 내게 바로 저런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푸념했다.
20대 여성, 진보의 편에 서거나 침묵하거나
20대 여성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우선 부유한 20대 여성을 보자. 이들 역시 586 부모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훌륭한 일자리를 차지했으나, 직장에서는 유리 천장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다. 이들이 진보적 스탠스를 버릴 수 없는 이유다. 이 집단이 유독 진보 정당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통계로도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가난한 20대 여성은 어떤가? 아이린 레슬리(Irene Leslie)가 '노예의 노예(slave of slave)'라고 불렀던 바로 그 계층이다. 부유한 20대 여성이 '기생충의 기생충(parasite upon parasite)' 신세를 벗어난 것과 달리, 이들은 여전히 노예의 노예다. 이들은 빈부 격차와 성차별이라는 두 개의 차원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으므로 가장 극렬한 진보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생존이 힘겨운 이들에게 정치투쟁은 사치에 불과하다.
20대를 네 개의 집단으로 나누어 분석하는 이 책은 아쉽게도 가장 열악한 4사분면인 '가난한 20대 여성'에 대해 거의 분석을 하지 않고 있다. 달리 말해, 이들은 불공정을 분석하는 책에게조차 외면당하는 신세다.
20대 중산층 남성이 왜 절차적 공정성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는 앞 장에서 논의한 2010년 이후 노동시장에서 '번듯한 일자리'에 진입하는 데 가장 어려움을 겪게 된 집단이 20대 중산층 남성이라는 점과 연관될 것이다. (274쪽)
저자는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가난한 20대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전자가 명시적으로 분노를 토해내는 데 반해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번듯한 일자리'는 역사상 그 어느 시점에서도 가난한 여성에게 주어졌던 적이 없다. 그래서 '번듯한 일자리'를 빼앗긴 가난한 남성들과 이들은 또 다르다.
진짜 분노해야 하는 대상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586 세대는 한국 현대사상 처음으로 높은 대학진학률을 기반으로 '번듯한 일자리'를 쟁취한 세대다. 이들은 계층 사다리를 수월하게 올라갔다. 이들은 때마침 벌어진 1997년 외환위기에 편승해 급격한 신분 상승을 경험했다. 외환위기 당시 기업들을 몰아친 구조조정이 이들의 상사들을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빈자리를 무혈점령하고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586 세대의 성공에는 이렇게 다양한 우연이 작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능력이나 노력에 불비례한 성공을 거뒀다고 비난할 이유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외환위기 사태는 한국 현대사에 고유한 사건이지만 학력 고도화로 인한 새로운 화이트칼라 일자리가 대거 생성되는 것은 역사적 필연에 가깝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분노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이 역사적 필연이다. 우리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수많은 선진국에서 일어났던 일이 드디어 이 나라에서도 벌어지는 것이다. 바로 '세습 중산층'의 등장이다. 이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그랬듯이 자신들이 타고 올라갔던 계급 상승의 사다리를 걷어차려 하기 때문이다.
조국 전 장관이나 인국공 사태의 수혜자들, 그리고 LH의 일부 심신미약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불공정한 시스템의 수혜자이거나 심지어 범법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스템을 만든 자들이 아니다. 우리가 정말로 비판하고 변화를 요구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그 시스템을 고착화하려는 집단이다. 그것이 바로 '세습 중산층'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미 '세습 중산층'을 형성한 그들이 스스로 양보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임금피크제 역시 대개의 경우 실패했다. 저자는 현재 직업전선에 진입하는 20대부터 '직무급제'를 도입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모든 현직자들에게 일괄적으로 직무급제를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사회 초년병들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스스로 지적했듯, 이들은 균질한 집단이 아니다. 불과 몇 년이라고 해도 경력을 이미 쌓은 20대가 신규직원들과 같은 급여체계의 적용을 받겠다고 할까? 상명하복을 근본으로 하는 징병제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이 사회의 문화가 그걸 과연 받아들이겠냐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달 대신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던 우리들에게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지를 짚어주었기 때문이다. 낯뜨거운 제목으로 판매 부수나 늘려보려는 얄팍한 책들의 홍수 사이에서, 제대로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세대와 공정이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여 '세습'이라는 진짜 문제를 숨기면서 적당히 양보하는 척하며 실질적인 손실을 보지 않는 노회한 86식 정치 투쟁의 구호가 한국 사회를 뒤덮는 양상이다. (342쪽)
조작된 구호에 속지 말자. 문제는 어떤 특정 인구집단이 아니라 '세습'이라는 시스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