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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발표에
청중들이 분노한 이유는?

[책을 읽고] 마야 뒤센베리,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by 히말

다른 모든 영역과 마찬가지로, 의료에도 젠더 편향이 있다. 남성에 비해 여성은 사망률이 낮지만 질병 발생률은 높다. 이를 젠더 패러독스라 부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성에게는 비치명적 만성 질병이 더 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자연의 섭리는 아니며, 성차별의 결과이기도 하다.



아픈 여자들을 의사가 외면하는 두 가지 방법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히스테리'라는 진단명이 존재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여성에게 별다른 원인을 찾지 못하는 경우, 심인성 질환이라 단정하고 '히스테리'란 이름을 붙였다. 이런 증상 중 많은 것들이 이제는 병명을 찾았으며, 다른 것들도 조금씩 원인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다.


젠더 패러독스를 만드는 의료계의 편향은 두 개의 차원에서 벌어진다. 첫째, 신약 개발을 비롯한 의료 연구가 백인 성인 남성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지원을 받아 록펠러대학교가 진행했던 '비만과 유방암 사이의 상관 관계 연구'는 남성 환자들만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웃기기는 하지만, 상황이 이 정도로 심각하다는 걸 잊지 말자. 심지어 쥐 실험에도 주로 수컷 쥐가 쓰인다고 한다.


둘째,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대로, 신뢰의 문제가 있다. 의사들은 여성 환자의 말을 믿지 않는다. 여성은 고통을 과장하고, 심지어 없는 증상을 만들어 낸다고 믿는 것이다.


1971년 부인과 의학 교과서는 "많은 여성이 고의든 아니든 신경증적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질병의 심각성을 과장한다."라고 경고한다. (170쪽)



잘 모르겠으니까, 기능성


현대 의학에서도 두루 쓰이는 '기능성(functional)'이라는 말은 인식가능한 기질적 원인이 없는 경우에 쓰이는 말로, 사실상 '심인성'이라는 단어와 병행해 쓰인다. <미국의학윤리협회지>에서 한 학자는 '기능성'이라는 말은 50년 전의 '정신신체증(psychosomatic', 100년 전의 '히스테리'와 같은 말이라고 썼다. 내가 최근에 읽은 작가로서 이 단어를 많이 썼던 것은 올리버 색스다. 그의 책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는 환자들에게 대단히 감정이입을 잘하는 의사인데도 그렇다.


의료계가 치명성 질환을 우선시하고 만성 질환을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문제는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온 문제다. 에모리 대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을 때, 나는 이 점을 지적하는 만성질환과 교수의 세미나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교수의 논점은 만성 질환의 방치로 인한 엄청난 의료 재정 손실이었지만, 나는 삶의 질 하락으로 인한 사회 전체의 비금전적 손실이 만성 질환의 진짜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성 환자에 대한 불신, 그리고 의료 연구의 젠더 편향으로 인해 예전에는 '히스테리'라 불리던 것들이 차례차례 개별적인 병으로 밝혀지고 있다. '만성피로증후군'이라는 오해하기 딱 좋은 병명은 요즘 '근육통성 뇌척수염'이라는 좀 더 정확한 병명으로 불린다. 앞의 이름은 그냥 꾀병처럼 들리지만 뒤의 이름은 듣기만 해도 살벌하지 않은가?


라임병은 바이러스 감염인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저 '꾀병'으로 치부되어 왔다. '체위성 기립빈맥 증후군'은 나도 가지고 있는 기립성 허혈증의 심각한 버전인데, 역시 여성 환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난소암은 증상이 없다?


난소암은 증상이 없어 오랫동안 '침묵의 살인자'라고 불려 왔다. 문제는 이게 사실이 아니라는 거다. 오랫동안 난소암 환자들은 복부 팽만감, 복부 통증, 음식 섭취 곤란, 빈뇨 등의 증상을 호소해 왔다. 의사들은 귀기울이지 않았고, 난소암은 말기가 되기까지 증상이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드디어 1998년 난소암생존자학회에서 일이 벌어졌다. 난소암에 관한 발표를 끝낸 의사에게 한 청중이 난소암의 초기 증상에 관해 물었다. 그는 배운대로 대답했다. 난소암에 초기 증상 같은 것은 없으며, 그래서 난소암은 침묵의 살인자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이 학회의 청중은 앞서 말한 대로 '난소암 생존자'들이었다. 청중들은 일제히 분노하며 야유를 보냈다.


당시 강연장 뒷편에 앉아 있던 부인암 전문의 바버라 고프(Barbara Goff)는 청중의 분노에 놀라면서 자신이 발표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청중 몇 명을 만나 그들이 왜 분노했는지 물었으며, 상황을 바꾸는 방법은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것뿐이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난소암 생존자들의 도움을 받아 논문을 준비했고, 2000년 미국암협회 학술지에 결과를 발표했다. 2007년 미국암학회는 '침묵의 살인자'라는 명칭을 철회하고 난소암의 초기 증상 네 가지를 인정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다음 번에 아내가 병원에 갈 때는 내가 동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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