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우리는 공감을 버려야 한다

[책을 읽고] 공감의 배신 / 폴 블룸

by 히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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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도덕을 해친다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다. 공감은 어리석은 판단에 근거할 때가 많고, 무관심과 잔인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비이성적이고 부당한 정치적 결정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의사와 환자의 관계처럼 중요한 관계를 좀먹고, 친구나 부모, 남편, 아내로서의 역할을 더 어렵게 만든다. (10쪽)


두어 달 전에 읽었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와 같은 주제를 다루었지만, 폴 블룸의 분석은 훨씬 더 치밀하고 정연하며, 무엇보다 현상 진단에 그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의 저자 브라이트하우프트도 지적하듯, 공감은 편가르기를 조장하고 피해자를 피해 상태에 방치하게 만드는 등 위험한 요인을 안고 있다. 그러나 폴 블룸이 지적하듯, 공감의 진정한 위험성은 그것이 도덕적 판단 근거로 오용된다는 점이다. 공감할 수 있어야만 도울 수 있다면,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거나 직접 보지 못하는 비극에 대해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공감(empathy)는 언젠가부터 동정(sympathy)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 '동정하지 말고 공감하라'는 조언을 우리는 얼마나 여러 차례 들었던가. 동정은 상대방을 얕잡아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언어는 움직이는 생물이다. 어떤 단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신비한 색채를 잃고 나면, 사람들은 다른 단어를 찾아 나선다. compassion이란 단어가 빛이 바래자 sympathy라는 단어가 득세했고, 이 단어가 유행이 지나가 empathy가 득세했다. 공감이란 단어가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하는 책들도 무수히 보았다. 앞의 두 단어가 '함께'라는 느낌이 강했다면, 공감이란 단어는 방향성을 강조한다. 상대방의 마음속으로 내 감정을 이입하는 것, 그것이 공감이라고 많은 이들이 역설한다.


저자는 간단한 실험을 소개한다. 불치병에 걸린 소녀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은 피험자들은, 순번을 기다리던 다른 환자들을 제치고 그녀가 우선적으로 치료 받는 데 동의하는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공감이 공정성을 해친 것이다.



나는 칸트를 거부한다


적어도 도덕에 관해서만큼은, 결과가 중요하다. 피터 싱어의 도덕 철학 체계가 벤담의 공리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만 봐도, 도덕에 있어 결과를 중시하지 않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추상적인 도덕 원칙과 상관없이 결과'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가벼운 상처만 입힐지, 아니면 죽일지를 결정하는 상황에 놓인다면 어떨까? 칸트라면 두 가지 행위 다 잘못된 것이라고 항의할 테지만, 후자가 더 나쁘다는 점에는 그도 동의할 것이다. (만약 그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칸트가 제일 나쁘다.) (59쪽)


내가 칸트를 배척하는 이유는 사실 그렇다. 내가 보기에 칸트는 덜 해로운 결과를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할 것이다. 그것이 칸트의 '정언명령'이 가진 허점이며, 절대주의가 빠질 수밖에 없는 해악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다. 벤담이 위대한 이유는 자기만 옳다는 절대주의에 빠지는 대신, 상대적 관점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방법을 고민했기 때문이다.



공감은 차별한다


저자가 도덕과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공감이 결과를 해치기 때문이다. 위의 실험에서 보듯 공감은 도덕적 근시를 양산하고, 팔을 안으로 굽게 한다. 그 이유는 공감이 스포트라이트와 같기 때문이다.


스포트라이트는 빛을 비추는 면적이 좁다. 이것이 공감이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 많다. (60쪽)


저자의 결론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도덕률은 공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제력과 사고력을 발휘해서 얻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냉정하게 사고해야 하며, 그렇게 사고하는 데 있어 공감은 방해가 된다.


특정인에 대한 공감보다는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68쪽)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에도 소개된 내용이지만, 사이코패스는 사실 공감 능력에 뛰어나다. 그들은 상대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듯, 사이코패스의 문제는 공감능력이 아니라 자제력 부족이나 악의적 본성과 더 관계가 깊다.


또한 공감은 편가르기에 사용되는 아주 강력한 무기다. 러스트 벨트의 백인 실업자들에게 깊이 공감하여 대통령이 된 트럼프가 설득력 있게 증명하지 않았던가. '미국'의 태풍 피해에는 사리에 맞지 않는 거금을 투척하면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동남아의 자연재해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수준의 성금을 보내는 것이 바로 공감의 효과다.


버트런드 러셀은 신문을 읽을 때 좀 더 공정한 시각에서 사건을 이해하려면 해당 나라의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넣어보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스라엘'을 '볼리비아'로 바꾸어 읽고, '미국'을 '아르헨티나'로 바꾸어 읽어보라는 말이다. (204쪽)

201702020475993676_1.jpg 러셀


공감은 우리가 더 친근하게 느끼는 존재, 더 애착을 느끼는 존재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물론 그 좁은 빛의 영역에서 배제되는 피해자들에게 우리는 더욱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단지 편애에서 벗어나 편가르기로 확대되면, 그것은 증오와 전쟁을 낳는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면, 사람들이 더 높은 지능과 자제력을 갖추도록 빌어야 한다. 지능과 자제력이야말로 행복하고 성공한 삶, 선하고 도덕적인 삶으로 이끄는 핵심요소다. (422쪽)


위 문단은 이 훌륭한 책을 대단히 깔끔하게 정리하지만, 나는 이어지는 다음 문단을 한층 더 추천하고 싶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개개의 사례에 공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일반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들 녀석들 중 하나가 우리 조상이 공룡을 타고 다닌 것으로 생각한다면, 나는 그런 견해가 일상생활에서 중요하다고는 보지 않지만 그래도 충격을 받을 것이다. 아들 녀석이 자신의 정치 이념에 맞는다는 이유로 터무니없는 주장을 진실인 것처럼 지지한다면, 나는 그때도 끔찍한 기분이 들 것이다. 우리는 진실을 믿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4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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