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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Nov 28. 2017

시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

[서평] 유시민의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 표지 (저작권자 푸른나무)

1987년 1월 14일. 참고인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이 사망했다. 6월 민주항쟁의 불씨가 된 이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유시민은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를 통해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며, 역사를 진보의 수레바퀴 위로 올려놓는 것은 시대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몇 가지 질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첫째, 역사는 필연인가, 우연인가. 둘째, 역사를 이끄는 것은 영웅인가 민중인가. 셋째, 역사의 심판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이다.

우연과 필연

우선 우연 대 필연의 문제를 생각해 본다. 역사가 우연의 집합이라고 주장한다면 한갓 허무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모름지기 인간에게 어떻게든 소용이 되어야 하는 학문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따라서 이 생각은 기각한다.

Photo from Pixabay



다음은 역사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사관이다. 역사 이전에는 신화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필연적 역사관은 선형적 신화와 유사하다. 대표적인 것이 아담과 하와의 추방에서 시작되어 예수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기독교의 역사관이다. 이런 생각의 문제는 역시 종착점 이후에 존재하는 상상력의 빈곤이다. 우주가 붕괴하지 않는 한, 그리고 인류가 소멸하지 않는 한, 우리 인간은 무언가를 계속할 것이고, 아마도 같은 행위를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생각이 역사의 종착점을 가정하기도 하지만, 종착점은 진보와 근본적으로 상충하는 개념이다.

필연적인 역사관이라도 종착점을 반드시 가정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불교의 세계관은 순환론적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가 지향하는 해탈이라는 종착점을 생각해 보면, 불교 역시 순환론이라기보다는 예이츠식의 나선형 진보를 이야기하는 듯싶다.

역사에 우연은 없다는 생각은, 우연한 사건들이 서로 상쇄되어 필연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사실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통계의 문제이다. 이 주장의 문제점은 영웅과 민중을 차별한다는 점에 있다. 1929년 미국발 대공황 당시 스미스 씨가 실직하지 않았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 예컨대 잭슨 씨가 실직했을 것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전대미문의 실업률이 나타나는 똑같은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우연이 소위 영웅, 즉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의 차원에서 발생했다면 어떨까? 예컨대 히틀러가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초상화가가 되었다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 낮았다든가, 레닌이 54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하는 질문은 사실 다음 질문과 이어진다. 즉,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영웅인가 민중인가 하는 문제다.

영웅 대 민중

영웅 사관은 직관적이다. 저자의 말대로 아이들에게나 적합한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서술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진시황을 습격했던 형가의 일화를 자객열전에 남긴 것은 그것이 눈에 보이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의 폭력적인 통일 과정에 희생된 사람들의 원한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형가 (이미지 출처 - 한국경제)



저자의 말대로, 영웅이란 그 시대의 필요, 또는 민중의 힘이 구체화된 것이다. 예를 들면, 한나라 말기의 막장 사회상은 장각이 아니었어도 민중봉기를 몇 번은 부를 수준이었다. 따라서 장각이라는 인물이 없었어도 대규모 민란이 있었을 것이다. 황건적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는 했겠지만 말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 낮았어도, 당시 로마의 정치 상황은 여러 명이 권력을 나누어 갖기에 적합한 구조가 아니었다. 따라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미모가 아니라 권력에 반해서라도 연합을 했을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없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내전이 일어났을 것이고, 세력의 규모상 이집트 왕실도 내전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영웅의 역할 역시 인정해야 한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내 생각에 영웅은 역사의 힘이 가시적으로 구현된 형태에 불과하다. 즉, 영웅이 어떤 특정 개인으로 나타나는가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 헤겔의 말대로 위인이란 "자기 시대를 실현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 역할을 맡음에 있어 그가 기여하는 바는 0%라고, 나는 생각한다. 천재를 좋아하는 내가 이런 생각을 지지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이젠베르크를 빌려 표현하자면, 역사가 전개되어 관찰자의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누가 영웅의 역할을 담당할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역사의 심판

가장 어려운 문제다. 역사의 심판이란 그냥 사람들이 쓰는 수사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어떤 과거 사건과 연관된 역사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경우, 사람들은 역사의 심판이 내려졌다고 말한다. 아직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역사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고 말하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쓰는 '역사의 심판'이란 표현은 '정의의 심판'이란 말과 치환할 수 있다.

역사의 심판이란 것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역사가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면 인간이 점점 평등해지는 것이 역사의 방향이라고 본다면, 노예제는 그 방향성에 반하는 제도다. 따라서 역사의 에너지가 충분히 모여서 노예제도를 폐기하려고 할 때 그 흐름에 맞서는 자가 있다면 그는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과연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가 하는 첫 번째 질문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역사는 과연 필연의 집합인가? 강이 바다 쪽으로 흐르는 것이 필연이라면, 예컨대 모종의 이유로 바다가 강 쪽으로 역류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 필연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다. 즉 역사에 방향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큰 그림에서 나타나는 대세적 방향성이다.

Photo from Pixabay



인류의 역사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라는 분명히 가시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만이 아닌 시간 자체의 역사를 다루는 '큰 역사(Big History)'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빅뱅 이후 천체의 형성이나 생명체의 진화 과정을 보면 방향성은 역시 존재한다. 더욱 복잡하고, 더 질서 잡힌 체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자연계의 분명한 법칙이 엔트로피의 증가인데, 왜 역사는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까? 역사의 과제라는 것은 결국 무질서에 대항하는 것인가?

세상에는 무질서에서 더 큰 이득을 볼 기회, 그리고 그것을 움켜쥐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민주 질서를 요구하는 시민사회를 힘으로 눌러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던 1980년 당시 신군부 세력이 그런 사례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가 마땅히 가야 하는 방향을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까? 몬테주마 2세가 지배하던 아즈텍 제국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바쳐 죽어가는 태양을 살리는 것이 마땅한 역사의 과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20세기의 후반부를 지배했던 냉전은 역사의 방향에 대해 크게 생각이 다른 두 세계의 대립이었다.

일반적으로 '몬테주마 2세'라고 알려진 아즈테카 제국 황제 목테수마 2세 (출처 - thefamouspeople.com)



역사는 현재와 관련해서만 의미를 지닌다. 거대한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려고 하는지, 한갓 인간에 불과한 우리가 예단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현재라는 시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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