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도처에 널려있는 내로남불
책을 읽는데, '도그지어'라는 국적불명의 단어를 만났다. 괄호 안에 dog's ear라고 쓰여 있어 간신히 알아봤다. 그게 자신의 독서 습관이라나 뭐라나.
그런데 같은 책의 조금 뒤에는 '자연스럽다'를 '내추럴하다'라고 써야 잘 쓴 글처럼 보이는 게 아니다, 착각하지 마라는 얘기가 나온다. 코웃음이 쳐졌다. 조금 전에 '도그지어'라는 정체불명의 단어를 쓴 사람은 누구였던 건가? '책 귀퉁이를 접어놓는다'는 표현 대신 '도그지어를 해놓는다'는 수상한 표현을 쓴 사람은 누구냔 말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제작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터미네이터 2> 이후에 나온 모든 후속작들을 인정하지 않겠노라고. 제대로 된 후속작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이렇게 시작한다. (스포일러 주의!) <터미네이터 2>에서 스카이넷의 탄생을 저지한 린다 해밀턴과 에드워드 펄롱이 바닷가 주점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때, 어디선가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아놀드 슈왈제네거. 에드워드 펄롱, 그러니까 존 코너는 순식간에 살해당한다.
그런데 제임스 카메론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에일리언 3>의 도입부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전편에서 갖은 고생 끝에 살아남은 캐릭터를 죽이면서 시작해서 얻을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에일리언 2>에 등장하는 꼬마, 뉴트는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리플리와 함께 탈출한다. 그런데 그 꼬마는 <에일리언 3>의 시작 시점에서 이미 시체다. 시작부터 말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자신이 저런 논평을 했다는 사실을 아마 잊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20년쯤 지나서 자신의 대표 프랜차이즈 영화 속편에서 그야말로 똑같은 전개를 감행할 수 있겠는가.
내로남불이라는 단어가 괜히 명언이 아닌 거다. <에일리언 3>의 도입부 전개는 괴상한 것이고,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의 도입부는 참신한 상상력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걸 제임스 카메론 자신을 제외한 누가 인정할까?
만화 <키드갱>에 보면 홍구가 '밀실 살인'이라는 말을 했다가 강대봉에게 된통 얻어맞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홍구는 그저 '밀실살인'이라는 멋들어진 말을 써보고 싶었던 거다. '밀실살인'이라는 표현을 정당화하려고 궤변을 늘어놓아 보지만 홍구는 결국 실패하고, 강대봉에게 속마음을 들키고 만다.
개그 만화에서 홍구는 귀엽기나 하지, 현실에서 만나는 내로남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중잣대는 집어치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