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모르는 사람의 차에 올라타는 시대

[책을 읽고] 레이첼 보츠먼, <신뢰 이동>

by 히말

에어비앤비에 관한 사고 소식을 한두 개쯤 들어봤을 것이다. 우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긱 경제, 플랫폼 기업, 그리고 블록체인은 내가 흥미롭게 쫓고 있는 주제들이다. 그러나 제이슨 달튼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했다. 그는 무차별 총기 공격으로 6명을 죽이고 2명에게 중상을 입힌 우버 기사다. 그는 우버 기사로 일하던 도중에 이런 일을 벌였다. '현실이 물어뜯는다(reality bites)'라는 표현이 아마 이럴 때 적절하지 않을까. 갑자기 사람들은 우버라는 서비스의 본질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우버란, 모르는 사람의 차에 올라타는 것이다.


우버를 조금이라도 이용해 본 사람이라면, 평점 4.73인 기사가 앱 화면에 뜨는 것은 흔히 있는 일도 아니고 바람직한 일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카카오택시 잡기가 어렵듯, 우버도 가끔은 정말 안 잡힐 때가 있다. 그럴 때라면 평점 4.73은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한 부분이 된다.


달튼은 살인행각을 벌이기 직전, 갑자기 난폭 운전을 했다. 중앙분리대를 넘어 가속하는 차에서 내린 승객은 우버에 난폭운전을 신고했지만, 우버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트래비스 칼라닉의 우버에게 뭘 바라겠는가?) 911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도 별 다를 것이 없다. 인도가 오토바이 다니는 길로 바뀐 게 도대체 몇 년 전인지도 모르겠다.)


아는 것에서 모르는 것으로 이행할 때, 사람들은 개념, 플랫폼, 그리고 개인이라는 세 개의 차원에서 신뢰 도약을 이루어야 한다. 저자는 우리가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다고 말한다. 지역적 신뢰, 제도적 신뢰의 단계를 거쳐 이제 분산적 신뢰의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긱 경제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제적 붕괴 현상은 긱 경제를 가능케 한 기술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 변혁으로 인한 신뢰 이동으로 인한 현상이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다른 저자들은 신자유주의가 기술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빌미로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것이 긱 경제라 말한다. 이들의 진단이 노동자 쪽에서 본 입장이라면, 레이첼 보츠만의 진단은 사용자 쪽에서 본 입장이다. 신뢰 이동에 대처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상품과 서비스의 공급자들이다. 예컨대 제도적 신뢰의 시대에는 브랜드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분산적 신뢰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많은 기업들이 SNS에 열을 올리는 것은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신뢰라는 문제는 단지 사용자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신뢰는 모두의 문제다. 분산적 신뢰라는 말은 사실 단순하다. 료타르가 말한 '소담론'의 등장에 다름 아니다. 그랜드 내러티브가 제도적 신뢰에 대응하고, '소담론'이 분산적 신뢰에 해당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지역적 신뢰, 즉 아는 사람을 통한 이야기만을 신뢰하던 고대로의 회귀와도 같다. SNS 피드나 앱 평점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다. 해당 사안에 대해 이해관계를 갖지 않은 중립적 화자의 증언을 듣고 싶은 것이다.


평점은 단지 우버나 옐프에 머무르지 않는다. 중국 정부는 사회신용점수라는 것을 만들어 1984를 현실화하려 하고 있다. 지금은 신용도 점수가 은행 대출 정도에만 문제가 되지만, 중국의 사회신용점수는 일상 생활의 거의 모든 것에 관련된다. 점수가 높으면 공항에서 VIP 체크인을 이용하고 보증금 없이 차를 빌릴 수 있지만, 점수가 낮으면 출국이 아예 금지되고 아이들이 명문대에 지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중국에는 이미 비슷한 것이 사용되고 있다. 알리바바는 '세서미 크레디트'라는 것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 점수가 높아지면 알리바바의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할 때 특혜를 받을 수 있다. 앞서 말한 공항에서의 빠른 체크인 같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세서미 크레디트는 물론 사회신용점수를 높이려고 애를 쓴다. 프라이버시와 자유도 어느 정도 이상의 돈이라면 포기할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저자는 특히 분산원장에 대해 긍정적이다. 1993년 앨 고어는 인터넷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 예견했지만,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지금 우리는 블록체인 기술의 1993년 즈음에 있다. (521쪽)


저자가 글을 쓴 시점은 2016년이다. 그녀는 10년만 지나면 블록체인이 인터넷처럼 될 것이라 말한다. 2026년까지는 5년이 남았고, 현재 블록체인은 거의 암호화폐에만 국한된 투기의 장에 불과하다. 1998년 인터넷은 사회 현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의 블록체인은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책에 나온 DAO 해킹 사건을 보자. 어떤 사람이 이더리움의 헛점을 파고 들어 대량의 이더리움을 획득했다. 이에 대해 이더리움의 창립자 비탈릭 부테린은 하드 포크를 제안했고, 이 제안은 무려 87%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무슨 얘기냐 하면, 분산 원장을 공식적으로 조작하는 것이 승인된 것이다.


나는 5년 전에 이더리움에 소액을 투자했다가 간신히 본전치기를 하고 빠져나온 적이 있다. 당시에 이더리움과 관련한 최대 이슈는 이더리움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대대적인 하드 포크였다. 당시 이더리움은 거래 수수료로 이용되는 가스의 부족으로 인한 병목 현상이 심각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김에 이것저것 손을 본다는 것이 부테린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부테린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하드 포크를 계속해서 미뤘다. 그가 약속한 이더리움 업데이트는 5년이 지난 2021년 10월 현재도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하드 포크로 불리던 개소리를 지켜보면서, 나는 비탈릭 부테린이 트래비스 칼라닉에 견줄 만한 강아지 아들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나는 블록체인의 파괴력을 믿고 싶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란 그 어떤 것도 무너뜨릴 만한 거대한 힘이다. 단기적 성과와 돈만을 추종하는 작금의 자본주의는 그 어떤 역사의 물길이라도 적어도 잠시 동안은 휘게 만들 힘을 가지고 있다.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미래는 정치에 달려 있다. 그리고 정치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달려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디스토피아, 각자도생이 인류의 미래인가